어려운 일과 쉬운 일의 차이

by 이도수 posted Mar 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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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특징 중에 하나가 성령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을 시작으로,

성령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표적과 이적을 행하시는 사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람을 세워서 파송하는데 앞장섰던 안디옥교회도 성령께서 사람을 보내라고 하셨기에 그렇게 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4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9-10절)

이렇듯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사도 바울과 바나바 등을 만날 수 있다.

 

바울과 형제들은 구브로를 떠나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게 된다(행13장).

그런데 이곳에서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 무리에서 이탈하는 일이 벌어진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13절)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한 절로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함께 전도여행 하는 지도자인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에선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처한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후에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크게 다투게 된다(행15장).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때문에 갈라서서 따로 전도여행을 가게 된 것을 보면,

바울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마가 요한이 부족하며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 마가 요한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바나바와 바울을 떠나서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

이런 저런 추측을 할 수는 있겠지만, 성경에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바나바보다 더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면서 바나바의 생질이었던 요한이 불만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건강이 썩 좋지 않은 바울이 배를 타고 전도여행을 다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아시아의 내륙지방까지 또 들어가려고 하는 모습에 동의할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나도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다.

바울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한 사도였다.

바나바 역시도 그러했을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 옆에서 함께 하는 것이 어떠할지를?

쉬운 일일까, 아니면 어려운 일일까?

성령이 충만하며 인도하심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그런 지도자와 함께 동의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힘들고 짜증스럽고 동의하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가 요한이 그런 후자의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어찌보면 무모할 정도의 사도 바울의 결정과 추진력을 보면서, 성령의 이끄심이 없는 마가 요한에게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성령께 민감하며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도하심이 없으면서 함께 하는 것은 억지로 해야 되므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이 어떤 이에게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쉬운 일도 어려운 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 옆에 있는 것도 좋고, 내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며 그 맛을 누리며 사는 삶은 또 얼마나 멋진 삶인가?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순종하는 삶을 소망한다.

 

주님,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