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통해서 본 은혜와 자유

by 이도수 posted Jan 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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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미제라블'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발장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룬 소설 레미제라블을 왠만한 사람들은 읽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몇 일전에 레미제라블을 뮤지컬 영화로 개봉했다는 얘기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감상해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뮤지컬의 생동감과 재미를 겸한 영화를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스토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감흥과 재미는 가히 한 편의 평범한 영화와는 다른 벅찬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빵 한조각을 훔친 것 때문에 20년형을 선고받은 장발장.

모든 젊음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19년만에 가석방으로 세상에 나왔지만,

세상은 그를 평범한 시민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는 가석방된 죄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도망친다.

 

그는 굶주림과 쫓김을 피해 한 성당으로 도망쳐서 하룻밤 먹을 양식과 잠자리를 제공받는다.

그는 죄의 본성을 억제하지 못하고 성당에 있던 성물들을 훔쳐서 야반도주하게 된다.

그러나, 금방 경찰에 잡히게 되고 다시 그 성당의 신부 앞으로 끌려오게 된다.

그때, 신부는 장발장에게 은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냐고 하면서 정죄하기는 커녕,

오히려 장발장에게 은혜와 자비로 대하면서 그를 사랑으로 용납한다.

그때부터 장발장의 인간적 고뇌는 시작된다.

그는 평생 속죄하며 받은 은혜를 갚으면서 살기로 다짐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정도 후에 장발장은 어느덧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업가이자 시장이 되어있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이웃집 아저씨같은 시장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를 쫓는 자베르 경감의 눈을 피하진 못한다.

.......내용 중략...........

 

오늘은 줄거리를 기록하려는 것은 아니다.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삶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한바가 있어서다.

자베르는 평생 정의와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나름 그 시대의 의인이었다.

그러나 그 의로 자신과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율법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은혜와 자비를 모르고, 정의와 법을 집행해야만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은혜를 모르고 살다가, 장발장에게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은혜를 얻지만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어갔다.

 

장발장도 사실 자비와 은혜를 받았지만, 참된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아니었다.

평생 신부에게 받은 은혜와 자비에 감사했지만,

그 은혜를 갚으면서 죄의식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듯한 삶을 살았다.

선을 행해야 하며, 속죄해야 하며, 의롭게 살아야 하며,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 의식이 평생 그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 당시 프랑스의 천주교적인 배경과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이다.

선행이나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만 구원받는 인생이 아닌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5-7)

 

우리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물론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의롭다함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은혜로 말미암아서 자유로운 삶은 아니지만, 그 마음의 선한 이끄심에 따라서

선을 행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장발장의 삶은 어쨌든 참으로 고귀한 삶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