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구원받지 못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예수를 믿긴 믿는데, 삶을 보면 별로 신통치 못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보면서,
과연 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는 판단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불안해지는 경험을 한 번 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제대로 살지 못하다가 구원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3:12)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14절)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15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고 있으라는 말씀이다.
말씀을 읽으면서, 붙잡지 않으면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는 것 같다.
구원에 있어서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기 때문이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16절)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17절)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18절)
이러한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원망, 불평하며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죽음을 당했었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들처럼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음을 당하는 인생이 되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히2:15)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2:16)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2:17)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4)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4:3)
즉,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도 아니요, 우리가 행한 일도 아니다.
우리의 행동이 구원의 근거였다면 그 구원은 롤러코스트처럼 멀미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잘 할 때는 구원받았다가 잘 못할 때는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공로주의 종교가 되어버리고 만다.
나를 구원하신 그 분의 존재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다.
나의 행동이나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이 구원의 근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의 구원은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근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