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남왕국에 훌륭한 왕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히스기야이다.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그는 다른 선왕들도 행하지 못했던 산당을 제거하며 우상을 훼파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광야에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백성들이 우상처럼 섬겼는데 그것을 부수는 일도 행하였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다.
그로 인해서 히스기야는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 복을 누렸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18:7)
형통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면 형통하다.
성경에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형통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의 대명사 요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산 다윗,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부름받은 에녹과 엘리야 등등 ...
하나님과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케 하신다.
자, 그런데 형통한 히스기야에게 앗수르가 침공하여서 큰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
앗수르는 심각한 폭언으로 히스기야와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한다.
앗수르 군대의 장관 랍사게는 더군다나 유다말로 떠들면서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히스기야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앗수르 왕을 의지할 때에 너희들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꿀로 배불리 먹여줄 것이라고 조롱한다.
유다 백성들에게 왕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마음을 갖게 하고 불안함을 극단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망령되이 일컬으며 조롱하는 랍사게의 말은 온 나라를 흔들어 놓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히스기야를 형통하게 하셨는데, 왜 이런 침략을 당하는가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의인에게 왜 고난이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형통이란 정의를 다시 한 번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형통은 세상적인 성공과는 다른 것이다.
형통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형통이다.
오셉이 노예로 팔려지고, 감옥에 갇혀지는 상황 자체는 힘겨운 일이었지만,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 했으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는 삶을 살았다.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시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룬 것이다.
다윗도 십여년을 사울에게 쫓기면서 광야에서 고난의 시간을 겪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형통한 사람의 모습이 다 그렇다.
잘 먹고 잘 살다가 그렇게 천국에 갔더라는 말은 없다.
그렇다면, 고난 중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서 지낼 것인가,
아니면 환난과 고난도 다스리시며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고난 중에 있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형통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형통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 형통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가?
즉,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세상의 관점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 있는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형통한 삶이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