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는 견고하리라

by 이도수 posted May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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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일에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가 인생 전체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실직하게 된다면 우리를 잘못된 이유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섭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입시에, 연애에, 취업에 실패했을지라도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실패가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얼마 전 복음을 전했던 지역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을 살피고 싶어 합니다. 예수를 믿게 된 형제들의 믿음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함께 했었던 바나바에게 다시 동역할 것을 요청합니다. 바나바도 흔쾌히 함께 하겠다고 하면서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제안합니다. 그렇지만 바울 입장에서는 많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번 전도여행 중에 마가 요한은 일행에서 이탈하여 돌아갔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13:13)

 

그 사건 때문에 바울은 상당한 불편함과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전도여행 중에 한 사람이 떠나면 아무래도 팀원들에게 영향이 있습니다. 사기 저하와 지도력 손상이 있으며, 분열의 불씨로 팀이 와해되어 전도 여행의 실패까지도 갈 수 있게 됩니다. 지난 번 기억 때문에 바울은 마가 요한도 함께 데려가자는 바나바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바나바는 계속해서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는 갈등과 분열이 벌어지고 맙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15:38~39)

 

물론 어떤 관점과 시각에 따라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방향과 철학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 맞고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사역 중심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전도여행 중에 돌아가는 일이 또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 요한의 삼촌이었던 바나나는 인간적인 정과 긍휼의 마음으로 접근했습니다. 바나바는 관계 중심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 요한의 가능성이나 장래를 생각해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친하게 동역했던 두 사람이 심히 다투고 급기야는 “피차 갈라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꼭 갈라설 수밖에 없었을까요? 첫 번째 전도여행을 하면서 함께 고생하고 기적과 역사를 경험했는데, 다툼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갈라서는 것이 최선이었을까요? 물론 가능하면 함께 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두 사람은 논쟁하고 변론하고 뜻을 모아 보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갈라서게 됩니다. 차이가 너무 크고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고통스런 상황이라면 갈라설 수도 있습니다. 다른 모임이나 단체를 만들어서 해결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것이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길을 택했으며 전도 팀은 두 팀이 되었습니다.

 

다툼과 갈라서는 일이 있었으나 그들은 형제들에게 축복을 받고 떠납니다. 나눠짐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합의하여 공동체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툼으로 생긴 나쁜 감정과 불편함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 요한은 화해와 용서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마가 요한이 위로와 유익이 되었다고 감사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갈라서게 만들었던 논쟁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분열로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는 두 배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의 다툼과 분열이 합리화되거나 정당화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은 차선을 택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15:41) 다툼과 분열이 있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가는 곳마다 교회들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 실패, 잘못, 죄악 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한 가지 일에 실패하더라고 그 실패가 우리 인생 전체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시나 사업이나 연예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이든 잘못이든, 적절하지 못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 구할 것이 있으면 용서를 구하고, 돌이켜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실패했다고 미움과 적대적 감정에 매몰되지 않아야 합니다. 최선의 선택을 못했다면 차선의 선택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나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직장 생활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경험한 그 길은 최선의 길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고 나는 믿습니다.

 

누가는 분열 사건을 감추거나 미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기록했습니다. 성경은 무오하지만, 성경 안에 활동했던 인간은 무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오하지 않은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견고하고 든든하게 세우시며 다스리십니다. 인간이 실수하고 잘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핍박하는 자들이 짓밟고 없애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됩니다.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아달랴에 의해서 다윗의 씨가 몰살을 당할 뻔 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요아스가 살아남아서 다윗의 혈통 지켰습니다. 바벨론 포로시절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지키셨습니다. 로마시대 3백년 이상의 핍박과 박해가 있었지만 기독교는 사랑과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교회는 환난과 핍박이 오히려 거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영원히 지키십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믿음을, 구원을,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환난이 우리의 신앙의 꽃을 피우게 할 것입니다. 코로나19로 교회가 약화되고, 성도의 숫자가 줄고, 예배의 약화를 우려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돈과 힘과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래 위가 아니라 믿음의 반석 위에 집을 짓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행하시고 이루십니다. 하나님나라는 견고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