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었습니다.
혼돈(formless)은 황무지 같이 폐허이며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형태가 없으므로 허무하고, 무익하고, 공허한 상태입니다.
공허(empty,)도 혼돈과 비슷한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텅 비었으므로 무익하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흑암(darkness)이 깊음 위에 덮여져 있다는 표현은 어두움이고, 불확실성이고, 절망입니다.
이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때로는 우리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방향을 잃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혼돈의 상태입니다.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황무지의 상태입니다.
욕망과 욕심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괴로운 상태입니다.
우리가 공허할 때 무기력과 무능력과 허탈에 빠져들어 우울증과 자괴감으로 고통받습니다.
공허란 것은 연료가 완전히 바닥난 상태이며 살아야 할 의미도 잃은 것입니다.
우리가 흑암을 만났을 때는 어떻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절망하며 괴로워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가게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사업을 더 이상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모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릅니다.
질병 때문에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고로 병으로,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어떡하면 빠져 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는 비관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창1:2)
다시 말해서, 희망과 의욕을 다 상실했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하나님은 너무 멀게 느껴지고,
하나님은 차라리 안 계신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 우연히 이 땅에 존재한 것 같고, 삶의 의미도 없고, 열등한 존재같고, 가족에게 오히려 짐이라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고 잘못된 생각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내 위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내 삶과 인생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운행하신다는 것은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적인 의미로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이 완전히 날 수 있을 때까지 새끼 위를 맴돌며 지키고 보호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미새는 새끼들 위를 배회하며, 새끼들이 날다가 아래로 떨어질 때 급강하하여 그를 잡아채어 추락으로부터 지킵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하늘에서 위엄을 나타내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공허와 혼돈과 흑암을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능력과 의지가 됩니다.
우리도 말씀을 붙잡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빛이 있으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계획에 따라서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세상에서 충만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며, 정복할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서 빛이 있으라고 선포하면 됩니다.
나의 인생에 빛이 있으라.
당신의 이름을 넣어서 ‘OO의 인생에 빛이 있으라’
'가정에 빛이 있으라' '가게에 빛이 있으라' '직장에 빛이 있으라'
직장과 사업장의 이름을 넣어서 선포하세요. 'OO 식당에, OO은행에, OO자동차에, OO구청에, OO중학교에 빛이 있으라.'
자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OO에게 빛이 있으라.’
그리고, 우리 함께 선포하시죠. '한국 교회에 빛이 있으라.' '대한민국에 빛이 있으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던 곳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