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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살다> 이진희

by 안은실 posted Dec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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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시간,모세의 광야

 

 

예전 코미디 프로 중에 ‘쓰리랑 부부’라는 마당극 형식의 코너가 있었다. 주인공인 쓰리랑 여사는 순악질 여사처럼 일자 눈썹을 그리고 나와 “음매, 기죽어! 음매, 기 살아!”라는 대사를 매번 반복했다. '기죽는다, 기산다'는 말은 그렇게 웃긴 말이었나! 리듬을 붙여 내뱉는 이 말이 정말 재미있었다.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아도 이 대사만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나의 기죽음은 웃어 넘기질 못했다. 꽤 오래도록 기가 죽어(?)살았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이,특히 말 잘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었다.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낸 모세도 ‘참 기죽어 살았겠다’ 싶다. 그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면 별다르게 내세울 게 없다. 젊을 나이에 광야로 도피했고 40년이 지나니 인생의 황혼기가 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보다는 마무리해야 어울릴 나이다.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잊혀진 사람으로 살았으니 삶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광야에서의 삶은 언제, 어떻게 끝나는 것인가? 마침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사람에게 좌절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의미없는 시간의 연속, 저자의 표현처럼 ‘그 날이 그 날이고, 그 날이 또 그 날인 삶’ 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왜 40년이어야 했을까? 저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이 시간에는 모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다림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다림이라, 나의 삶을 통해서도 대충은 알 것도 같다.

 

 

너무 초라한 곳에 나타나신 하나님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못할 정도로 초라한 인생은 없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가시떨기나무에 임하셨다. 가시떨기나무는 보잘것 없다. 한번도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다. 있는 것은 가시밖에 없는 초라한 나무가지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무는 타들어 가지 않는다.

저자는 40년동안 광야에서 모세가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초라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불꽃으로 임하여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모습과도 같은 가시떨기나무에 임하셨으나 불꽃으로도 사그라들지 않는 나무의 모습은 이제 모세가 살게 될 새로운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어떤 인생도 쉬이 사그라들수 없음을 증명하시듯이.

사진출처 gettyimagesbank.com/가시떨기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사 43:2

그러나 모세가 완벽하게 준비되었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은 아니었다. 완벽한 준비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내가 다 할 테니 너는 따라오기만 해라.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변’이다.

광야에서의 40년, 이 긴 기다림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광야를 건너게 된다. 광야를 아는 모세가 그들을 인도해내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광야에서 모세가 보낸 시간은 허비가 아닌 준비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는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준비시키셨다.

초라한 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롤러코스터같은 믿음으로(믿음없이가 더 정확하다)살았다. 들쭉날쭉, 내 신앙에 견고함이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이 필름처럼 휙휙 머릿 속에서 돌아가던 날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 필름을 돌리기 위해서 나를 먼 ‘기르키즈스탄’으로 보내셨다.

여름방학기간동안 봉사활동을 위해 두 주간을 나가 있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밤에는 선생님들과 함께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저녁 프로그램은 일명 ‘라이프 스토리’ 나누기였다. 돌아가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 날 나의 인생을 간단하게 추려 발표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근데 그 날 밤, 침대에 누운 나에게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내 인생이 한꺼번에, 가감없이, 50 여년치가 한꺼번에 영화필름처럼 돌아갔다.

부끄러움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죽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맘 대로 산 인생을 아프게 보았으니 이제 살아야 할 인생이 무엇인지 저절로 답이 나왔다. 스크루지에게만 기회가 있던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춤인 별점 최하의 일대기로 나를 깨우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기준은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수 없는 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무능한 연고가 아니라 충분히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니! 세상에선 유능함이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 때까지 기다리게 하신다. 기죽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다듬어가신다.

모세의 광야는 하나님의 광야였으며 하나님의 사전에 허비된 시간이란 없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의 기준과는 차별화된 주님의 전략, 연약한 자를 들어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람 사용설명서'는 은혜 그 자체라고밖에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