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방주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동물들도 들어가게 했습니다. 40일 동안 땅에서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에선 창들이 열려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급기야, 세상의 모든 높은 산들이 다 물로 덮였으며 땅 위에 있던 호흡하는 생물들은 다 죽었습니다. 노아 시대 홍수가 과연 사실인가에 대해서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땅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내게 있어서 증거는 성경이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의 증거나 설득이 내게는 필요 없습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에 관련된 이런 저런 책이나 정보를 찾아보았습니다. 1992년에 창조과학자들이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 크기의 5분의1 정도의 축척으로 만들어서, 선박해양연구센타에서 해사기술연구소와 함께 안정성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실험을 해보니까 파고 30미터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복원안정성, 파랑안정성, 구조안정성에서 최적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늘날의 퇴적층과 탄광이나 화석 등은 노아 시대의 홍수 같은 대홍수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화석이 만들어 진 것이나, 화석이 높은 산 위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도 홍수로 물이 산까지 차 올랐다가 빠지면서 산 꼭대기에 물고기나 조개류등이 화석으로 남았다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미국 조지아 주립대 제임스 스트리크링 교수는 말했습니다. “대재앙적인 홍수가 있었다면, 고대 기록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로는 다양한 부족과 국가에서 총 190개의 홍수 대재앙의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기록과는 별도로 개별적으로 전해지는 기록입니다. 190개의 홍수 재앙 이야기의 공통점은 첫째, 전 세계적인 홍수가 인간과 동물을 다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둘째, 홍수 중에 안전한 선박이 있었다는 것이며 셋째,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내용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서 할아버지가 들려 준 홍수이야기를 기록이나 그림으로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문으로 배 선(船)자를 아십니까? 한문은 어떤 형상을 본 떠서 만든 상형문자입니다. 배 선(船)자는 배 주(舟)변에 여덟 팔(八)자와 입 구(口)자입니다. 한 배에 여덟 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배 선이라는 한문을 만들면서 노아 시대의 여덟 명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아 시대에 홍수가 있었다고 해도, 본 적이 없으니까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더 많이 있습니까? 과학으로 밝히지 못하는 것들이 또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홍수가 났을 때에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18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주에는 돛과 닻이 없었고 동력도 없이, 그냥 물 위에 떠다녔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떤 동력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물 위에서 떠다녀야만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만들라고 한 그대로 방주를 만든 후에, 방주에 몸을 싣고 맡겼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몸을 다 맡긴 것입니다. 노아의 어떤 노력도 무의미한 상황입니다. 물에 떠 있을 때도 염려나 걱정을 한다고 해서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안 하고 있으면, 무책임과 무능력을 느끼면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할 수 있겠지만, 맡겨야 할 때는 맡겨야 합니다. 수술대 위에 누워 본 적이 있으신가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수술대 위에서 수술하고 있는 의사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하겠습니까? 그저 전적으로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무조건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걱정하고 두려워 한다고 해서 수술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술대 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맡겨야 편안하지, 믿지 못하고, 맡기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잘 될 수술도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맡기면서 시작됩니다. 전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면서 맡겨야 합니다. 맡기면 떠 다니는 듯 합니다. 사람들은 돛도 없고, 닻도 없고, 무동력이니까 불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아빠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아빠에게 몸을 맡기고 풍차를 돌려달라고 하거나 목마를 태워달라고 합니다. 롤러코스트처럼 스릴을 즐기자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온 몸을 아빠에게 맡기면서, 아빠를 의심하거나, 빙글빙글 돌리다가 확 놔버리면 어떡하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엄마가 의심하고 더 무서워합니다.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정말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 거야? 믿는다고 천국에 간다면 못 갈 사람이 누가 있냐고 그럽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고 그럽니다. 노라도 있어서 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닻을 올려야 하고, 돛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력을 달아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하며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공허함과 허무함과 허탈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인정이 되어야 맡길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맡기든지, 믿고 맡기든지 맡겨야 합니다.
인생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헤엄을 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배를 만들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홍수에 아무리 수영을 잘 해도 버틸 수 없습니다. 쓰나미에 휩쓸리면 누구도 살아 남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없습니다. 배를 만들어 보지만 헛수고입니다. 어떤 수고가 무용지물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의존이며 전적인 하나님의 신뢰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