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기뻐합니다

by 이도수 posted Dec 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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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탄절을 맞아서 동두천의 어려운 80 가정에 쌀, 생필품, 겨울용품을 나누었습니다. 필리핀 보홀섬에 교회와 선교센터를 건립하는 사역에 1백만 원을 지원하며, 서아프리카(브루기나파소, 브룬디, 코트디부와르, 가나 등)에 1백 권의 성경을 보내며,  근육병을 앓는 가장이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는 형편이 어려운 한 가정에 가스렌지를 설치해드렸습니다.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말씀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동방에 있던 박사들이 메시아 탄생을 알리는 별을 따라 유대땅까지 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본 그들은 구약의 예언을 알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이나 동족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멸시를받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어도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인정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찾는 아기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 제사장, 선지자이며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로 가져와 드립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큰 기쁨의 소식이지만 헤롯에게는두려운 소식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계략을 제어하시며 예수님을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계획을 어떤 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도 하나님의 세밀한 보호하심과 주권 아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선물을 드린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주일(12/18) 성탄발표회에서 정성과 열심을 다해서 찬양과 악기와 워십으로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구제 현장과 선교지를 찾아서 성탄감사헌금으로 소중한 선물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한 여인은 자신의 소중한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렸습니다. 값으로 따져도 엄청나게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왠만한 사람이 일년을 벌어야 살 수 있는 비싼 향유였습니다. 향유는 그녀의 전 재산이며, 장래를 위해서 모아 왔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머리칼로 향유 묻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온 집안에 향유의 향기가 가득한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 여인의 소중한 선물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순식간에 '허비'하느냐고 책망합니다. 물론 그 돈이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는 명분을 내세워 비판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사랑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시면서 세상 끝 날까지 기억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찌보면 왜 비싼 향유를 그렇게 순식간에 낭비하고 있는데 내버려 두라고만 하느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꼭 그런 방법으로 영광을 취하셔야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경배받기에 합당하시며 마땅히 경배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을 앞두고 일어난 특별한 사랑의 선물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합니다. 경배와 예배를 위해서 돈과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쓰는 것을 낭비이며 허비라고 하는 것은 예배를 모르는 것이며, 진정한 선교와 구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해방신학과 자유주의신학이 그랬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민중을 위한다면서 주님에 대한 예배는 등한시하고 거기에 드는 돈조차 선한 일과 구제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편으로 보면 그럴듯한 논리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향한 경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구제의 대상입니다. 예배를 등한시한 해방신학이나 자유주의신학의 열매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실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사는 길이며 힘을 공급받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배 때문에 쓰게되는 수고와 재정은 허비가 아닙니다. 주일에 예배하는 것이 낭비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예배해야 구제와 선교도 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돈과 시간과 에너지을 쓰는 것을 아까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좋은 선물이며,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하며 경배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