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께서 첫번째로 올리라고 하셔서 쑥스럽지만 올립니다.
청년1부 6월 23일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통해 참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해서 훈련시키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수많은 죄인들과 세리들, 여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기도 하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기적들을 하실 때에 참 품위있고 멋있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별반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복음서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도 뱉으시고, 혀에 손을 넣으시기도 하면서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 병자는 귀먹고 어눌한 자였습니다. 어눌하다는 것은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단어의 뜻이 쓰인 용례로 볼 때 벙어리를 가르킵니다. 사람들이 이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그 병자와 몇 제자들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다른 때 안하시던 행동을 하십니다. 33절부터 35절입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라면 말씀으로 나으라 명하셨을 것입니다. 소리를 통해 의사전달이 가능했으니까요. 예수님의 능력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말도 못합니다. 그는 오로지 보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보는 가운데 행동을 하십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습니다.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동을 눈을 크게 뜨고 보았을 것 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찌릿 찌릿하면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러한 접촉 방식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방식이라고 말씀드리면 더 마음에 닿을 것도 같네요. 예수님은 대상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셨다는 것에 오늘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져야 합니다.
들을 수 있으면 말씀을 하십니다. 볼 수 있으면 행동을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접촉점을 찾아 그 접촉점을 향해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들을 수 없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들었지!" 하시지 않습니다. 볼 수 없는 자에게 행동하시고 "잘 봤지!" 하시지 않습니다. 들을 수 없으면 보여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는 방법을 찾아 그것을 느끼도록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연약하면 연약한 데로 다가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접촉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나를 아시고, 나를 만지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말속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던 한 사람이 오늘 이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행동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혀를 손에 넣는 만짐을 통하여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삶속에서 이런 느낌이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접촉하시는 방법 가운데 그 분의 사랑의 느끼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낙심했을 때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위로가 느껴진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을 회복하시기 위해 접촉하시는 그분의 음성으로 인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무리 가운데 끼어있는 나로서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 오직 나만을 위해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시고 받아들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상태를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십니다. 34절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바다" 즉 열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것은 그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기도요, 선포임을 봅니다. 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탄식이었습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 연약하여 괴로움 가운데 있는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였습니다.
이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이 오늘 저에게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으로 들려옵니다. 우리의 아픔을 치료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탄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을 아시고 같이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치료해주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 가운데에서 많은 은혜를 받아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분주한 일들 가운데에서도 이 한 사람을 위해 이 곳에 오셔서 이 한사람과 접촉하셔서 그 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와 접촉하십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채널을 통해 우리와 접속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공감과 만져짐을 갖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느껴질 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원합니다.
찬양을 부르며 마음이 뜨거워 진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찬양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과 접촉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여러분과 접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그 어떤 것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발견하신 접촉점이기에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신 것임을 믿으시고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설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은혜를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그 방법으로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형제, 자매에게, 공동체에게 다가가기 원합니다.
상대가 깨달을 수 있는 방법으로 상대를 사랑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귀머거리에게 소리로 다가가지 않으시고 만짐으로 다가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지체가 깨달을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하시고, 표현하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에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탄식을 잊어버리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살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우리의 방식대로 할 때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맡길 때에 드러나지는 줄 압니다. 나의 방법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자유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저는 여러분과 접촉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접촉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고르신 방법이셨습니다. 죄로 인해 모든 영적인 레이더가 망가져 버린 우리와 무한하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도무지 접촉할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접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교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치고, 마음을 만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접촉에는 사랑이 있고, 희생이 있고, 수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접촉을 받은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과 희생과 수고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에게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원합니다.
청년1부 6월 23일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통해 참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해서 훈련시키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수많은 죄인들과 세리들, 여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기도 하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기적들을 하실 때에 참 품위있고 멋있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별반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복음서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도 뱉으시고, 혀에 손을 넣으시기도 하면서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 병자는 귀먹고 어눌한 자였습니다. 어눌하다는 것은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단어의 뜻이 쓰인 용례로 볼 때 벙어리를 가르킵니다. 사람들이 이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그 병자와 몇 제자들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다른 때 안하시던 행동을 하십니다. 33절부터 35절입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라면 말씀으로 나으라 명하셨을 것입니다. 소리를 통해 의사전달이 가능했으니까요. 예수님의 능력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말도 못합니다. 그는 오로지 보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보는 가운데 행동을 하십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습니다.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동을 눈을 크게 뜨고 보았을 것 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찌릿 찌릿하면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러한 접촉 방식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방식이라고 말씀드리면 더 마음에 닿을 것도 같네요. 예수님은 대상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셨다는 것에 오늘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져야 합니다.
들을 수 있으면 말씀을 하십니다. 볼 수 있으면 행동을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접촉점을 찾아 그 접촉점을 향해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들을 수 없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들었지!" 하시지 않습니다. 볼 수 없는 자에게 행동하시고 "잘 봤지!" 하시지 않습니다. 들을 수 없으면 보여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는 방법을 찾아 그것을 느끼도록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연약하면 연약한 데로 다가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접촉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나를 아시고, 나를 만지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말속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던 한 사람이 오늘 이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행동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혀를 손에 넣는 만짐을 통하여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삶속에서 이런 느낌이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접촉하시는 방법 가운데 그 분의 사랑의 느끼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낙심했을 때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위로가 느껴진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을 회복하시기 위해 접촉하시는 그분의 음성으로 인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무리 가운데 끼어있는 나로서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 오직 나만을 위해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시고 받아들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상태를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십니다. 34절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바다" 즉 열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것은 그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기도요, 선포임을 봅니다. 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탄식이었습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 연약하여 괴로움 가운데 있는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였습니다.
이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이 오늘 저에게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으로 들려옵니다. 우리의 아픔을 치료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탄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을 아시고 같이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치료해주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 가운데에서 많은 은혜를 받아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분주한 일들 가운데에서도 이 한 사람을 위해 이 곳에 오셔서 이 한사람과 접촉하셔서 그 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와 접촉하십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채널을 통해 우리와 접속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공감과 만져짐을 갖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느껴질 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원합니다.
찬양을 부르며 마음이 뜨거워 진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찬양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과 접촉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여러분과 접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그 어떤 것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발견하신 접촉점이기에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신 것임을 믿으시고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설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은혜를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그 방법으로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형제, 자매에게, 공동체에게 다가가기 원합니다.
상대가 깨달을 수 있는 방법으로 상대를 사랑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귀머거리에게 소리로 다가가지 않으시고 만짐으로 다가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지체가 깨달을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하시고, 표현하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에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탄식을 잊어버리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살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우리의 방식대로 할 때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맡길 때에 드러나지는 줄 압니다. 나의 방법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자유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저는 여러분과 접촉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접촉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고르신 방법이셨습니다. 죄로 인해 모든 영적인 레이더가 망가져 버린 우리와 무한하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도무지 접촉할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접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교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치고, 마음을 만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접촉에는 사랑이 있고, 희생이 있고, 수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접촉을 받은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과 희생과 수고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에게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