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진학이나 취업에서 한 두 차례 실패하고 재수 혹은 삼수를 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계기로 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거나, 진로 고민을 심각하게 하면서 본인에게 맞는 학교, 학과 혹은 직장을 찾아서 진로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 생활하는 분들이 영업이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거나 영업 방법의 다변화를 꽤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나도 직장을 선택하면서 많은 고민과 갈등과 기도를 하면서 취업을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아가려고 하는 길을 하나님이 막으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사시대에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가 두 명이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이건만 엘가나는 분명히 잘못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은 전쟁에서 남자들이 많이 죽거나 다치는 일들이 있었으며, 대를 이어야 하는 아들을 낳지 못하면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아내를 얻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그런 일이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시대적이며 사회적이며 인간적인 불균형와 왜곡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남자에게 두 아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갈등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아내 중에서 한나라는 여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브닌나라고 하는 아내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두 여자 사이에서 생긴 갈등과 시기와 질투는 꽤나 힘겨운 현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남편이 그 갈등의 시작이요 핵심적인 이유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남편은 한나를 더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전제를 드리는 제물의 분깃을 그녀에게 갑절을 줍니다. 그러니 브닌나는 한나가 자녀가 없는 것을 빌미로 삼아서 그녀를 심하게 격동하고 번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삼상1:6) 물론 태의 열매는 하나님께 있으며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사람의 출생과 성장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에 맡겨서 살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나의 불임은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셔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신지? 어떻게 한나에게만 그럴 수가 있는지? 한나는 너무나도 속상하고 답답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행하시고 은총을 베풀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납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해마다 한나는 가족들과 함께 실로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곳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릴 때에 울고 먹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인간적인 서운함과 괴롭히는 브닌나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에 빠진 스스로가 밉고 싫고 실망스러웠을 겁니다. 한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는 남편은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1:8)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아내를 위로하려고 해보지만, 오히려 한나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할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나는 열 아들보다도 당신 하나만이어도 괜찮아요’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이나 그때나 상황파악도 못하고 아내를 위로하거나 마음을 읽어주지도 못하는 남편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다못해 통곡하면서 간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이렇게 한나는 나실인에 대한 서원을 합니다. 오늘날 같아서는 부모가 자녀의 인생과 권리와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일방적이며 독단적인 기도라고 했을 텐데, 그 당시는 통용되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시대에는 자녀에게 감동과 상황과 이유와 축복 등을 이야기해주고 자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나아가려는데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아니 정말 하나님께서 그러시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당시 사사시대에 한나의 불임은 이스라엘의 불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한 사람, 이스라엘을 이끌어서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한나는 시대적인 암울함과 죄악과 사람의 필요성을 기도하면서 알았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던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는 말씀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떻습니까? 혹시 막히고, 답답하고, 막막하고, 아프고, 힘겹고, 속상하고, 무섭고,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할 때입니다. 이때가 하나님의 선하고 깊은 뜻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자고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