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함과 패함의 갈림길인 예수 그리스도

by 김세열 posted Oct 0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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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1부 설교의 요약입니다. 묵상으로 살피다가 설교문처럼 되어서 수정이 필요한 설교문입니다. 길기 때문에 별로 읽으실 분은 없을 듯한데 하번 시험삼아 올려보았습니다.


흥함과 패함의 갈림길인 예수 그리스도
본문:눅 2:21-40

예수님은 율법의 규례에 따라 할례와 헌신례를 받으셨습니다. 모친 마리아도 결례를 통해 정결의식을 치르는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할례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난지 8일째 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습니다. 

결례는 산모들이 아이를 낳으므로 부정하게 된 것 때문에 치르는 의식입니다. 산모는 출산후에 부정하게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자 아이일 경우 40일 동안 외출 및 성전예배를 금지당하다가 후에 정결예식을 통해 부정을 씻게 되는 것입니다.

헌신례는 이스라엘의 난 모드 초태생은 하나님께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장자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그래서 레위지파 전체가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5세겔씩 바치고 예물을 드려 자신이 봉헌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법의 제정자이십니다. 율법을 시행하시는 통치자이십니다.
고대 왕정제도하에서는 일반적으로 법을 제정하신 분은 그 법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법을 변경하기도 하고 법위에 군림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왕이 제정한 법은 백성을 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그 율법에 따른 의식은 죄인된 인간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에게는 소용이 없는 의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것을 지키심으로 율법에 얽매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왕이신 주님이 율법아래 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비하입니다. 법의 제정자가 친히 법에 매이는 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올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율법위에 있지만 친히 율법아래 있는 인간의 대표로서 율법을 지키시며,
예수님은 의인이시지만 죄인된 인간의 대표로서 율법을 지키시어 의를 성취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순종의  의를 죄인된 인간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할 것이다. 친히 권리를 포기함으로서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낮아지심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가르쳐주셨다. 소금은 자신의 모습을 손상함이 없이 맛을 낼 수 없다. 자신의 형체가 허물어지고 녹아져야만이 음식에 맛을 내는 가치를 발휘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처럼 맛을 내려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낮추어야만 한다. 그럴 때 진정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을 때에 그 밀알은 밀알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밀알이 자신을 분해하며 썩어질 때 그 양분을 모체로 하여 수많은 새로운 밀알이 생겨난다. 수십배의 가치를 가진 것이 된다.

우리는 세상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당한 대우을 받지 못함을 감수해야 한다. 복음을 들고 나갈 때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치 이하의 대접을 받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생각해야 한다. 법위에 있지만 법아래 있는 법을 배우고 의로운 분이지만 죄인의 자리에 기꺼이 낮아지셨던 예수님을 생각하여 스스로 낮아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낮아지게 되는가? 아니다. 주님은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 잠시 있는 세상에서는 낮아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높아질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나라보다 시간적으로 영원하며 질적으로 우수하다. 어느 나라의 인정이 더욱 지혜로운 것인가?
여러분이 주를 위하여 또는 주님의 명령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모욕과 멸시를 당하는 낮아짐을 감수한다면 하나님의 칭찬과 존귀함을 받는 자가 될 것을 확신하라.

아기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두 명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시므온과 안나였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신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안나는 성전에서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는 여선지였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일러주게 된다.

그 시므온의 노래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바로 아기 예수가 주의 구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또 그 구원의 대상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만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놀라운 사실은 시므온이 당시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과 다른 메시야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될 정치적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남북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수리아와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 나라다운 나라를 회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애굽에 때로는 헬라에 그리고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처럼 조공을 바치며 종된 나라로서 식민지로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대로의 소원은 성경의 메시야가 다윗왕처럼 이방을 무찌르고 근동지역을 제패하여 수많은 이방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부강한 나라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였고 심지어 수십년이 지나서 예수님의 공생애때의 가르침을 3년간 받은 열두제자들이 가진 메시야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예수님이 유대인을 위한 구원자가 아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한 구원자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만민을 위한 구원자라는 것은 민족과 혈통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없이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 낮은 자를 차별없이 백인과 흑인을 차별없이 남자와 여자와 주인과 노예를 차별없이 구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의 해방되는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는 별로 새롭지 않은 사실일 것입니다만 당대의 이 예언은 관습과 상식을 뛰어넘은 패러다임 쉬프트의 전환인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의식의 전환, 창의적인 기발한 발상이 당대의 신세대 학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어찌보면 고리타분하고 수구적인 시므온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시므온일까요? 당대에는 새로운 학문을 하는 유대인들이 없었을까요? 물론 어느 시대에나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발상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럼 왜 하필 시므온이었는가?

해답은 오직 하나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 자였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지만 진리의 성령이 가르쳐주시니 메시야에 관한 진리의 통찰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대마다 시대를 주장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이 사상으로 모든 행위들의 선악이 결정되고 그 사상에 따라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그에 따라 문화와 문명이 새로운 방향으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사상에 따라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큰 변화를 주도한 사상이 인간을 크게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인지해야 합니다. 오직 참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참 행복을 주는 사상은 성령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성령이 바로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이 신학문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직장에서 성경의 말씀대로 말하며 행해보십시오.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세상이 알수 없는 진리를 말하고 그대로 행해보십시오.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한 자가 될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높아지는 원리를 말하고 실천해보십시오. 세상이 놀랄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는 비밀을 말해보십시오. 그들은 이해못해할 것입니다. 참 행복과 참 만족의 길인 예수님을 전해보십시오. 그들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가로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것이 진리이며 참 행복의 길인 것을.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지혜자보다 지혜로운 성령의 사람임을 기뻐하십시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대해서 말씀한 내용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비방받는 표적되기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역사적으로 잘 알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었지만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철저히 비방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 민족의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왕과 바리새인들로부터는 더욱 비방을 받았습니다. 고향사람들에게도 비방을 받았고 심지어는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비방을 받은 일도 많았습니다. 이방인들로부터도 비방받아서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을 언도받고 로마병사들에게 매를 맞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기 위해 태어난 분임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놀랍도록 사실임을 여러분도 잘 알것입니다.

제가 관심갖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표현중 많은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이스라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리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 8:14)

예수님은 피할 곳이며 반석입니다. 환란날에 피할 반석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반석으로 인해 넘어지고 부러지고 잡히는 돌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는 안전을 제공하는 분이지만 누구에게는 멸망을 주는 분임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도 벌주시지 않고 멸망시키지 않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고 막연히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예언은 예수님이 흥함과 패함을 다 가진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는 구원자가 되지만 누구에게는 준엄한 심판자가 되도록 세움 받으신 것입니다.

지금은 바울처럼 은혜의 때요 구원얻을 만한 때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구원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다할 때는 구원의 기회가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도 기회는 사라집니다. 그 때는 심판의 때입니다. 구원의 기회가 상실되고 은혜가 폐하여진 때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에 모든 생각이 드러나는 때입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이 옵니다. 예수님이 그 날의 심판자가 되어 죄인들의 형을 집행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흥패의 기준점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우편이 행복의 시작이요 생명의 시작입니다. 좌편은 불행과 허무와 죽음의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의 내일 일도 알지 못합니다. 언제 우리에게 전도의 기회가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친구 우리의 가족이 은혜받을 날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전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패의 기준되신 예수그리스도,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행복의 시작도 예수지만 무시무시한 고통과 형벌도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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