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그 위대한 자유함

by 이석진 posted Oct 08, 200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본문은 히브리서 10:11-20입니다. 10월 6일 청년2부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고 또 가르치는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우리의 구원의 문제일까?" 이것은 곧 "왜 죄의 문제가 중요한가?"에 대한 문제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걱정도 하고 미래에 뭘 하면서 살까하는 고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헤어진 애인의 문제로 괴로워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집안의 우환과 돈 없음으로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을 맘대로 사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가지고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의 한 가운데서 기독교는 "구원의 문제, 죄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요즘 일반도서 작가 중 가장 존경받는 작가를 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스티븐 코비를 꼽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원칙 중심의 리더쉽"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사람입니다. 약 5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을 어떻게 그렇게들 열심히 읽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두꺼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많은 얘기들을 하지만 코비가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상황은 중요한 일, 긴급한 일 중에서 사람들은 긴급한 일을 처리하느냐고 인생의 많은 부분들을 사용함으로써 정작 준비해야 할 중요한 일에 대한 처리가 없어서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고 얘기를 합니다. 중요한데 긴급하지 않기 때문에 놓치는 대표적인 경우가 건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일들이 우리 삶에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닥친 긴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냐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정작 해야 할 싯점에 이르러서는 할 수 있는 바탕이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하고 당황합니다.

  저는 구원의 문제, 죄의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천만원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많은 시간을 천만원을 벌 수 있는 기회에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만원을 버는데 실패했다면 아마도 낙담하고 평생의 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긴급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문제로 우리들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 진학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긴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성 친구와 헤어진 문제도 긴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목회 초년병의 길을 가고 있어서 그런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이생에 이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내가 그 때 천만원을 벌었어야 하는데" "내가 그 때 진학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 때 승진을 했어야 했는데"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했던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을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학자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는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라고 말한 것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면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기 스스로 결코 완전한 의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죽음이 임박해질수록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문제 때문에 안타까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살면서 정말 안타까워하고 아까워하고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사실은 우리가 느끼는 긴급한 상황이였지 우리의 인생을 걸만큼 중요한 일은 극히 적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인생의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 같지만 않지만 나그네 인생 길에서 정리할 순간에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오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관절염으로 고생을 해서 너무 힘겨울 때 골수암이라는 판단을 받으면 관절염은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의 문제를 성경 전체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누구하나 거짓말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죄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린아이들도 이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 둘째 아이가 이제 한국 나이로 5살입니다. 만으로 하면 이제 4년 살았습니다. 몇 주 전에 제가 방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7살짜리 누나와 5살 짜리 동생이 논쟁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들어보니까 논쟁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쁜 마음씨가 한 번 우리한테 들어오면 나쁜 마음씨가 착한 마음씨로 변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나는 착한 마음씨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동생은 나쁜 마음씨는 그대로 있다고 서로 우기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나에게 물어보러 왔습니다. 제가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나쁜 마음씨가 그대로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들의 대답이 "없다"였습니다. 아니? 이렇게 똑똑할 수 있을까?

  성민이는 누나 미워한 적 없어? "응 없어" 다른 친구 때려 주고 싶은 때 없었어. "응 없어" "그럼 성민이는 나쁜 마음씨는 전혀 없네?" "아니 근데 있어" 나쁜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돼 "지옥에 가" 그럼 성민이는 지옥에 가야 돼? "묵묵무답" 그럼 나쁜 마음씨가 착한 마음씨로 바껴져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인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예수님 믿으면 돼" 이 순간 아이의 표정을 봐야 합니다. 갑자기 근심의 얼굴에서 환한 얼굴로 바뀌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신나서 몇 분 동안 말하는 내용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아이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들의 영혼은 죽을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에도 죄의 문제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 상태를 성경에서는 "화인맞은 양심"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죄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시대에도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으로 인해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짐승의 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제사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 방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어서 자주 드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11절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일"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한계과 있다는 것이고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비교해서 그리스도는 "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영원한"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의미하나요? 자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지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효력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의미가 뭘까요?

  이렇게 단 번에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죄의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14절에 놀라운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여기에 복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오늘 제 아들 얘기를 또 한번 하게 되네요. 이번 추석에 처가집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성민이가 외가집에서 가지고 놀던 자동차 하나를 할아버지한테 허락을 받고는 좋다고 가지고 왔습니다. 차로 한시간 반정도 걸리는데 집에 거의 다 도착해서 이렇게 제게 얘기를 했습니다. "아빠! 나 자동차 너무 무거워" 집에 올 때까지 외가집에서 준 자동차를 손에 들고 왔습니다. 자기를 태우고 오는 자동차에 자기 몸은 싣고 있으면서도 조그만 자동차는 자기 손에 들고는 무겁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의 자유가 이렇게 제한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죄만을 대신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바로 이것이 현재 완료 계속적 용법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시점에 이루어진 사실이 계속 효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죄책감 속에서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차에 승차해서 편안하고 기쁨의 인생 여정을 가지고 갈 수 있는데 죄의 문제를 손에 쥐고 인생이 다 끝날 때까지 무겁게 지고 나서 "너무 무겁다"라는 탄식을 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온전히에 해당하는 영어를 보면 perfect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퍼펙트 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로 여러분들을 퍼펙트하다고 하십니다. 완벽하다고 하십니다. 더 이상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추가할 것이 없다고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보응을 하셨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문제들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생각하고 돌이키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은 결과로 하나님이 그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죄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 자들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로 징계하시는 것은 죄에 대한 대가가 아니고 우리를 온전히 구원-영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의 성화로서의 구원-에 이르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한 번 읽어볼까요? 예레미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그 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는 내 법(율법)이 마음 속에 새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지워지지도 않고 파기할 수 없도록 내면화되어서 율법에 의해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심령으로 순복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1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기억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판단으로 즉각즉각 심판하던 것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용서함을 받아서 기억했다가 보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 죄를 완전히 덮으셔서 보이지도 다시 기억나게 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감격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죄로 인하여 죄책감과 탄식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철저히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를 않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핑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죄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뒤에 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죄를 지었다 싶으면 하나님 앞에 나서기를 꺼려 합니다.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을까?"에 대한 자책감이 커서 한동안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죄 지은 인간의 당연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우리 본성 가운데 이런 행동 양식이 있더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뻔뻔한 느낌이 들죠?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미 온전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온전한 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의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죄 지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