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 아버지 집인 그리스도인들

by 김세열 posted Oct 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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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 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눅 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 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 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성경에서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그래도 여러 군데 있으며  예수님의 30대의 공생애 기간의 사건이 주된 기록이지만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내용은 본문이 유일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먼저 본문의 사건과 예수님의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떠오르는 것은 자녀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사건을 살핌으로서 어떤 모습의 자녀를 양육할 것인가하는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녀교육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없고 이런 저런 가치들이 혼란한 가운데 자녀를 잘 양육하길 원하는 부모들에게 좋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우리에게 자녀교육을 잘하기 위한 모범으로서 예수님만을 제시한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지혜가 이르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복음을 기록한 목적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에서 둘째로 구원자 예수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도대체 2000년전에 일어난 한 사건과 그 사건속에 담긴 대화를 자세히 관찰하여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들을 함께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가야했습니다. 그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그러나 포로시대이후에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전 세계에 퍼져있게 된 상황에서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한국에서 추석이나 설날에 고향을 가는 일을 생각해서 비교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줄 알 것입니다.  당시의 교통상황은 오늘날보다 수십배이상 나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고향가는데 10시간 20시간이 아니라 10일 20일 걸릴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고향은 전국에 흩어져있어서 체증을 덜수 있는데 모두 부산을 간다고 해보십시오. 오늘에도 이삼일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두 예루살렘을 향해갑니다. 얼마나 혼잡하고 고통스러울까요?

명절을 지내는 절기가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오가는 길이 일주일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즉 가족이 2주간 오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거나 돈을 준비해야 합니다. 제사지낼 돈과 짐승를 사는 일, 2주간 묵을 여관들을 계획해야하는 일, 이런 비용을 매월 모아서 준비해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명절을 제대로 지내는 데도 얼마나 여러 가지 신경쓰고 해야할 일들이 많습니까? 아니 3박 4일 동안 여름 휴가동안 여행계획을 세워도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합니까? 그래서 요즘은 점차 명절도 간소화하고 하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의 고충은 훨씬 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중에 멀리 떨어지 유대인들은 대개 이 절기를 지키지 못하고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인들은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곤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면 유월절은 니산월 14일부터 21일까지 7일동안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7일동안 여관에 머므르면서 이 절기를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고는 다시 고향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43절에 보면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 절기를 온전히 다 보내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에 요셉은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처럼 목수는 부자들의 직업이 아닙니다. 그의 동네는 북쪽의 나사렛입니다.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가 예수를 낳을 때에 헌신례를 드리는 제물이 비둘기였습니다. 그 당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입니다.

어쩌면 요셉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수의 일을 몇주간 그만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달에는 매월 벌어들이는 소득이 반으로 줄 뿐 아니라 이 여행을 위해 1년간 틈틈히 돈을 비축하여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모은 돈으로 유월절을 지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먼길을 걸려 예루살렘에 왔고 보통의 유대인들이 하루 이틀 하고는 이만 되었다고 말하며 돌아갈 때에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의 끝날까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다 마치고야 돌아갔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실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경건한 신앙과 종교적 열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경건한 신앙 때문에 구원자가 되도록 영향받았다거나 부모 때문에 경건해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현대신학이 말하는 상승기독론의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실 때에 요셉과 마리아에게 태어나도록 예정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내실 때에 어느 가정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내도록 할까를 고려했을 때에 무엇을 가장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년시절의 환경은 부잣 동네의 부자아빠의 가정이 아닙니다. 부유함이 아니었습니다. 학력과 명예도 아닙니다. 권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가정이나 바리새인 가정이나 서기관과 같은 학자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을테니까요. 당시 목수가 학벌과 명예가 있을 리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주위의 환경도 교육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사렛은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천한 동네로 불려지고 있었으니까요.
결론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는데 가장 중요하게 보신 점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순수하고 신앙적 경건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부모님들 중에 자녀에 대하여 이렇게 미안해하는 분은 없습니까?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 우리 자녀에게 공부할 때 밀어주지 못해서 좋은 부모가 못되나. 아니면 내가 못배우고 머리가 나빠서 내 아들도 공부를 못해서 좋은 부모가 못되는 구나. 여러분 이런 염려와 죄책감같은 것은 날려버리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경건한 모습. 하나님을 향해 열심있는 모습. 이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공부 좀 못하고 좋은 대학 못해도 하나님이 인정받은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잘 키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를 가장 복되게 키우는 것입니다. 그 자녀에게 있어 경제적인 어려움과 곤란은 오히려 신앙안에서 겸손하게 하는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강하게 하는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내가 자녀에게 공부와 일과 결혼에 대하여 모든 돈을 아낌없이 밀어주고 최고로 해주었다고 말하면서 신앙교육은 잘 못시켰다고 하는 부모가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해준 물질이 그를 방탕하게 하고 교만하게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도 모르는 자녀가 어찌 부모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습니까?
자녀교육,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가정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교육임을 우리모두 다시한번 깨닫기를 바랍니다.


사건은 절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 일어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귀향길에 올랐으나 예수는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부모는 그 사실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 부모가 자기 아들의 행적을 모르고 떠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할 것입니다. 마치 영화 나홀로 집에 라는 사건에서 보여주듯이 많은 친적들과 아이들의 수를 세다가 동네아이를 대신 수를 세고 떠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걸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문화풍습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월절 행사가 끝나면 일시에 모든 유대인들이 귀향길에 오릅니다. 귀경때는 모두 출발시간이 다르지만 귀향일자는 모두 같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이미 떠났다고 해도 그 인파는 굉장히 많고 혼잡할 것입니다.  이 때는 보통 한 고향을 단위로 무리를 지어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지방사람들이 출발하고 가버나움지방사람들이 출발하고 등등말입니다. 즉 우리도 터미널에서 광주행 마산행 대구행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가족뿐만 아니라 친적들 그리고 동네의 아는 사람들 함께 적어도 수십명 아니 수백명씩의 무리를 지어 다닌 것입니다. 이 때 부모가 함께 아이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와 여자들은 앞에 가고 뒤에 남자들이 갑니다. 어쩌면 요셉은 예수가 엄마와 앞에 가는 행렬어디에 있겠거니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뒤의 남자들과 함께 하는 행렬에 있겠거니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행렬이 밤이 되어 잠을 잘 때는 비로서 가족끼리 모이게 됩니다. 본문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해 묻고 찾으며 밤을 새우고 다시 오가는 길을 다시 오면서 예수님을 찾아 헤멨습니다 아마 사람들의 행렬속에서 예수님을 찾고 부르며 애타게 예루살렘으로 거슬러 올라왔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용산에서 삼각지를 돌아오는 거리를 동네 형들과 함께 달리기를 했습니다. 6살 때였습니다. 한참을 뛰어 삼각지를 가니 이미 형들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삼각지를 돌아서 보니 방향을 잃었습니다. 뛰는데 이태원방향으로 갔습니다. 나는 길을 잃었고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는 울어버렸습니다. 길가는 아줌마가 저를 파출소로 데려다 주엇고 그 경찰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왔습니다.
잠깐이지만 그 기억은 생생합니다.

반대로 제가 부모가 되었을 때 우리 아들이 마을버스를 거꾸로 타고 없어진 일도 있습니다. 몇 시간을 찾아 헤맸는데 그 때의 타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부모 역시 하룻길을 찾아 오면서 얼마나 마음이 타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묻고 찾고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왔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선생들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면서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이히 여기더라는 단어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다는 단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성과 영적인 질문과 대답에 모두들 감탄하는 정도가 아니라 까무라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그 지혜와 영적인 깊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대 유대랍비들도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부모들은 예수님의 그와 같은 토론의 모습을 얼마동안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이 이렇게 뛰어난 자였는가 하고 부모역시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마 토론이 끝나고 부모는 예수님을 붙잡고 얼마나 염려하며 찾았는가를 말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셧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의 답변은 찾은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찾아 헤맨 것에 의문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추앙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도덕성이 의롭과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신학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인간도 의롭고,완전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혜가 뛰어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두려움도 없고 염려도 없었고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의아할 뿐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부모는 염려와 근심이 가득찼습니다.

이를 통해 한가지를 적용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만유를 주관하고 전능하신입니다. 모든 지혜에 통달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기이히 여길 지혜를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누리며 살 자들이익 때문입니다. 세상이 환란이 와도 염려할 필요없는 자들입니다.  성전을 아버지집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가질 수 없는 지혜와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의 삶은 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품속에서 보호받는 자처럼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환란과 곤고한 환경속에 있습니까?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할 까 고민되는 문제가 있기도 합니까?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해결의 근원이신 주님께 맡기고 평안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인식속에 오늘도 복되게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