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받은 자의 용서

by 이윤정 posted Oct 3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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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20일 청년1부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8:21-35
제목 : 은혜받은 자의 용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유대의 선생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여 주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습니
다.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한다면 굉장히 많이 용서해 주는 것이 되겠거니
싶어 주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본문과 같이 재미있는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용서라
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넣어주십니다.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회계할 때가 되어 끌려 왔습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로마에 내는 세금보다 더 큰 돈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큰 돈, 개인이 빚질 수 없는 큰 돈을 빚진 자가 있다는 재미
있는 설정입니다.
주인이 빚진 자에게 말합니다.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
게 하라"
종이 엎드립니다. 주인에게 절합니다. 사정 사정합니다.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주인은 곰곰히 생각합니다. 이 자가 평생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판다고 한들 그 금액에는 비슷하게 갈 수
도 없습니다.
그러나 빚진 자는 사정합니다.

주인은 불쌍히 여겨 놓아 주기로 합니다. 빚을 탕감해 주기로 합니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기에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빚진 자는 모든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인의 은혜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 종이 나가서 길을 가다가
동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동관이란 같이 종된 자란 뜻입니다. 아마도
같은 주인은 종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꾸어 주었는데
갚지 못하였습니다.

  이 종은 그 동관을 만나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멱살을 잡고 말입니다. 동
관의 대답은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그가 주인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입니다. 액수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습니다. 60만분의 1에 해당
하는 돈이랍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주인과는 참으로 다릅니다. 빚을 갚도
록 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옆에서 동료들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해도 너무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
게 가서 고합니다. 주인이 다시 그 종을 불러다가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
이 너도 그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그리고 결국 그는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용서하지 못했을 때 결국 받은 은혜의 가치를 모르는
것으로 여겨 악한 자로 불림을 당했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했는데 그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 시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
진 자에게 가지게 되는 시각과 우리가 빚진 자를 바라보는 시각 말입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참으로 매몰찹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자를 보는 시각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빚진 자를 바라볼 때에는 우리를 은혜의 눈으로, 사
랑의 눈으로 바라보아 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 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기
원하는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볼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기 원하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제자반에서 용서에 대하여 나누는 중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
니다.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필립 얀시는 용서는 비본성적 행위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용서는 참
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용서보다는 앙갑음이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듭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손해를 당했을 때에 우리는 그 만큼의 죄값을 묻고, 치루
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주인은 빚진 자를 향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용서했습니다. 주인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당연하다고 생
각합니다. 그분은 신이니까요, 그분은 용서할 수 있는 분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용서라는 것을 하시기 위해서 너무나 큰 값을 치
루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인간에게 피해보상액을 청구하
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값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갚아야 할 피해보상을 하나님 스스로 하기로 하셨습니다. 그
래서 죄를 진 인간 대신 하나님이 죄 갚을 치루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
어서 인간이 치루어야 할 죄 갚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이 피해보상은 요셉과도 많이 닮아있음을 봅니다.
요셉은 그를 죽이려고 했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애굽의 노예가 되게 했
던 형제들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의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거쳐
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고 나서 형제들을 구했고, 살렸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5장 1-2절에서 이
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
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 대곡하니 애굽 사람들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
중에 들리더라"

요셉의 용서는 감정의 격렬한 폭풍을 꺼내 놓으며 잠잠한 것 같았던 요셉의
내면을 드러내는 혼란과 고통 후에 주어진 값진 은혜였습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의 마음을 만지고, 요셉을 구원하시고, 요셉에게 은
혜를 부어 주셨기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요셉을 평온케 하고, 요셉으로 성숙하게 하였습니다.
자유케 하였습니다.

빚진 자는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묵상하고 감사했더라
면 그의 동관에게 빚 독촉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귀함을 느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값없이 받았음으로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십시오.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
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