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 세례요한

by 김세열 posted Nov 0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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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 세례요한

서론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소유에서 나오는가? 존재에서 나오는가?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존재가치는 존재의 이유에서 찾는 가치이다. 얼마전에 집사님이 망치를 샀는데 굉장히 비싼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양으로 봐서는 더 비쌀 이유를 찾지 못한다. 오히려 조금 더 작아보인다. 그런데 비싼 것이 왜냐면 일제란다. 그러면서 공구는 일제를 사야 오래쓴다고 덧붙였다. 왜일까? 일제공구는 한국산이나 중국산이나 망치의 용도로서 더욱 튼튼하고 못을 잘 박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가치있게 평가되고 더 비싸게 팔리는 것이다. 쓸모있을 때 가치있다. 쓸모가 아주 많을 때 가치가 많다.
즉 모든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전구는 빛을 낼 때, 바가지는 구멍이 나지 않을 때, 자동차는 잘 굴러갈 때, 공은 바람이 빠지지 않았을 때 가치가 있다. 아무리 좋은 3파장의 전구라도 빛을 발하는 목적을 상실할 때 그것은 가치가 없어진다. 아무리 예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색깔을 가진 바가지라도 깨어진 이상 가치가 없다. 그 존재의 목적이 장식용이 아닌 이상 쓸모 없고 무가치하다.

반면에 소유가치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가진 소유에서 찾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쓸모있는 존재이며 가치 있는 존재임을 소유에서 찾는다.
내가 가진 돈, 내가 입은 옷, 내가 타는 자동차, 이것이 나를 가치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십만원짜리 운동화, 수백만원짜리 옷등을 수천만원 짜리 자동차,  이것이 나를 가치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무리를 해서라도 메이커 옷을 사고 메이커 신발을 사고 심지어 도둑질과 강도질을 해서라도 자신을 가치있게 만들기 위한 소유들을 산다.
조금 낫지만 내가 가진 지식과 명예로 자신의 가치를 매긴다.

그러나
참다운 존재가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기준점을 시작한다. 사람의 목적이 지식을 얻게하는 것이나 명예나 권세를 얻어 누리게 지음받았느냐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망치의 가치를 따질 때 페인트 색깔이나 세련된 모양이나 무게등의 요인을 가지고 선별하는 것과 같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망치의 목적, 즉 못을 얼마나 잘 박게해주느냐일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무엇으로 평가되어야 할까?
그것은 사람을 지으신 존재이유, 존재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람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수행하는 자들만이 참 가치있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에게는 선하고 좋은 가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사명자였다.
메시야인 예수님을 그 백성에게 예비케하는 사명자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임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당대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하나님께 사용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왕에게 임한 것도 아니요 대제사장에게 임한 것도 아니다. 성전에 임한 것도 아니요 궁전에 임한 것도 아니다.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사람의 외모나 그가 가진 권세나 직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왜 빈들에 있었을까?
구약에 가장 뛰어난 인물 둘을 들라면 모세와 엘리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이면서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한 자들이다. 10가지 재앙과 홍해 바다를 가른 선지자가 모세요,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않게 하고 하늘을 열어 불과 비를 내린 선지자가 엘리야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많지만 중요한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빈들의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모세는 미디안의 광야에서 수십년을 지냈다. 엘리야는 길르앗 산지 촌인 디셉에서 사명을 받았다. 요한은 유대광야에 있다.
그들은 빈들에서 무엇을 하였으며 그리고 지금 세례요한은 빈들에서 사람이 없는 빈들에서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 이곳은 사람도 없고 문명도 없다. 그는 금욕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 사색과 묵상을 하면서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할 메시아의 선구자적 사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메시야의 예비자의 사명은 참으로 험란했다. 그는 담대하게 죄를 책망해야 했다. 그는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 군사들 뿐만아니라 당대 최고권세자인 헤롯왕에게까지 담대하게 죄를 책망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빈들없이 가능했을까?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과 인기에도 교만하지 않아야 했고 늘 겸손해야 했다.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예수님의 신들메들 드는 종보다도 부족함을 늘 고백해야했다.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역시 빈들에서의 훈련없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빈들이란 영적 훈련장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하는 것의 문제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이 정한다. 그러나 그렇게 정한 자들의 특징은 빈들을 가지고 있다. 세속과 단절되고 사명을 감당할 영적인 훈련을 받는 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되 그것을 주기 위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영적인 훈련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있는 모든 자들을 사명자로 보신다. 반드시 신학해서 목사나 선교사만이 사명자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삶,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든 말과 행위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배하는 삶, 기도하는 삶, 전도하는 삶, 남을 섬기며 돕는 삶, 그것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적어보이는 일일지라도,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루동안 장애우를 위해 봉사하고 노인들을 공경하는 것에서부터 전도하는 것,아니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가정에서 열심히 집안일 한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자세로 한다면 당신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명이 어떤참된 하나님의 종이 되길 원하는가? 하나님이 쓰시는 가치있는 사명자가 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일이라도 영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이 세상의 어떤 일도 사탄의 역사와 방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이 아주 평범한 가정일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공격은 끊임없이 집요하게 방해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소리치게 하는 일과 남편과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는 일, 직장일과 학교일을 게으르게 하도록 하는 유혹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빈들에서 훈련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수님이나 요한이나 모세만이 아니다. 영적인 훈련없이 영적으로 강한 군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훈련을 마다하고 큰 영적인 사명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귀한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도가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은 게으르기 쉽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영적인 능력을 키우는 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힘을 키우는 일이 빈들에서 선행되어야 한다.

빈들에서의 시간을 가져라. 하나님의 쓰시는 종이 되는 첫걸음이다.

둘째로
요한은 요단강 부근에서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이것은 요한의 사역을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그럼 이 회개의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가는 이 사역이 이사야의 책에 기록된 예언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유대땅으로 귀환할 때 그들과 함께 돌아오실 이스라엘의 참 왕되시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이었다.
이 예언은 고대의 왕의 행차의 관습을 비유로 하고 있다.
고대에는 왕이 어느 지역을 행차할 경우 선구자가 앞서 가서 왕의 행차를 외치고 왕이 탄 마차가 지나가기 쉽도록 인근 사람들을 모아서 도로를 고쳐서 평탄케 하였다. 그 도로가 골짜기라면 메워지고 높은 언덕이라면 낮아지고, 굽어지면 곧게 만들고, 험한길이면 쉬운 길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하실 주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제 세례요한은 죄와 사망의 포로에 갇힌 모든 자들을 위해 구원하실 메시야가 오기 쉬운 길을 만드는 선구자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메시야가 오는 길을 예비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도로를 보수하거나 정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메시야는 마차를 타고 입성하듯 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시야는 어디로 오시는가?
그분은 우리 마음의 길을 따라 우리의 마음속으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길을 평탄케 하고 예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은 회개를 외치며 자기 죄를 자복하고 나아오는 자에게 세례를 베품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영접하기 위해 합당하도록 마음을 평탄하게 하게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이 왕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주의 길 가운데 놓인 모든 골짜기와 산과 굽은 것과 험한 길은 무엇을 비유한 것일까? 그것은 주 예수님을 모셔들이기에 방해가 되는 죄악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교만이요 영적구원에 대한  무관심이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냉정함이요 자신의 생각만을 내세우고 귀를 틀어막는 독선이요 고집등의 죄악들이다.
그것은 주님이 그 심령가운데 들어가고자 해도 온갖 교만과 무관심과 고집의 죄악들이 길마다 틀어막고 방해를 하고 있는 심령과 같다. 이것은 복음의 씨가 뿌려져도 결실하기 어려운 돌밭과 가시떨기 밭과 길가와 같은 심령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 심령의 끝은 진노의 심판이다. 열매맺이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서 불에 던지우듯이 결국 지옥의 심판에 빠지게되는 것이다.

세례요한도 진노와 심판을 선포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요한 시대의 사람들은 진노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야 할 것이다.
그들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고 열매맺은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례요한은 주님께서 오시도록 죄인의 마음의 길을 닦으라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단지 마음만의 일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회개는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
세례요한은 옷 두벌있는 자는 옷없는 자에게 나누어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의 가르침인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 즉 강제징수하지 말라고 말한다. 군병들에게는 강포하지 말고 무소하지 말고 즉 허위명목으로 강탈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도 실패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회개는 열매가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입술로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백과 고백이 얼마든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입술만의 회개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이 따르는 진정한 회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으로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죄를 뉘우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에서 떠나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지적이고 정적이고 의지적인 3요소가 이루어wu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늘 행하던 어떤 일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까? 회개의 시작입니다. 죄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 일을 후회하고 부끄럽게 생각합니까? 감정적인 회개입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 일을 행한다면 회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세리들이 정한 세 외에 늑징하는 것을 죄인줄 깨닫고 후회하면서도 그 일을 계속한다면 회개가 아니며 군병들이 강포하고 무소하는 일을 후회하면서 죄라생각하지만 계속한다면 회개가 안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할 때 기브온 족속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그들은 모든 가나안 7족속이 일심으로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고자 할 때에 배반한 족속이다. 그들은 그들편에 가입하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거짓으로라도 화평하기에 안간힘을 다한다. 결국 그들은 거짓행장과 거짓말로라도 하나님의 편에 가입하고자 하고 언약을 맺기에 성공한다.
왜 이같이 했느냐는 여호수아의 말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행하였나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았고 그 하나님의 명령도 분명히 듣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땅 모든 거민과 자신들이 멸망당하리라고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을 안다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기브온이 잘한 것은 이같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기브온이 알고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는대로 마음으로만 회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했습니다. 하나님편에 가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브온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기브온족속은 나무패며 물긷는 종이 되었지만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고 살았는데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늘 하나님의 제사를 섬기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가 반드시 성공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보면 심령의 회개는 바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열매를 가진 회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명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찬송과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훈련이 없으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빈들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