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by 이도수 posted Feb 2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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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류 영화나 불륜을 다룬 통속 드라마를 보신 적 있으시지요. 남편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워서 얻게 된 아들이 나중에 성장해서 그 가정에 폭풍의 핵으로 나타납니다. 아들을 낳은 후처는 본처 노릇을 하려다가 여인들끼리 눈에 안 보이는 칼부림이 일어납니다. 아니면, 아들을 낳았지만 그 아들을 빼앗기고 쫓겨난다든지, 그 아들을 낳아준 진짜 엄마는 모르고, 길러준 엄마를 진짜 엄마로 알고 지냅니다. 이런 저런 3류 소설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드라마에는 꼭 시기와 질투와 애증의 보이지 않는 칼부림이 벌어집니다.


성경에도 3류 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될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직 출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온 지 벌써 십년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의 몸에서 상속자를 얻을 것이라는 말씀도 들었지만 아직 아들이 없습니다. 자녀를 얻지 못한 사래는 여종을 아브람에게 들여 보냅니다. 이 당시에 일부다처제가 가나안 땅에 있었습니다. 상속할 아들을 낳지 못하면 후처라도 들여서 아들을 낳는 것이 그 시대의 풍속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결혼 계약은 만일 신부가 2년 안에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하면 노예를 사서라도 이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의무조항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수 십년 전만해도 아들이 없으면, 그런 비슷한 방법으로 아들을 낳던 시절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의 풍속이 그렇다고 해도 여인 사래의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조바심과 미안함에 여종에게 남편과 동침하게 하는 사래의 심정은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여자로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수치심과 절망감과 죄책감마져 있었을 것입니다. 사래가 여종과 동침하라고 하니까 아브람은 일언반구도 없이 얼씨구나 좋다하면서 하갈과 동침하는 아브람의 불신, 속물근성(?), 이기심을 봅니다.

 

여종 하갈은 임신했다고 여주인을 멸시하고 업신여깁니다. 아들도 못 낫는 주제에라고 하면서 속을 뒤집어 놓았을지도 모릅니다. 경쟁심과 질투심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여종임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마치 아브람의 본처라도 된 것처럼 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게 했을 수도 있고, 사래의 자격지심에 사래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뭐 좀 되었다고, 이루었다고, 가졌다고 뻐기거나,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 좀 벌어도 더욱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 딸이 좋은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고 해도 너무 잘난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들이 고시 패스하고 고위직에 올라도, 세상에서 잘 나간다고 하는 사위가 들어와도 겸손하게 고개 숙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개 숙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 정말로 더할 나위 없이 존경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종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고 깔보니까 사래는 더욱 속이 꿇었습니다. 아들 못 낳는 것도 서러운데, 여종에게까지 멸시를 받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 났겠습니까? 여종 하갈의 방자함에 남편인 아브람이 전혀 대응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래는 분노를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남편인 아브람에게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여종이 임신을 하더니 나를 깔보기 시작했습니다. 도가 너무 지나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습니까? 내가 옳은지 당신이 옳은지 하나님이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아브람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사래는 하갈의 멸시와 자신의 업신여김이 다 아브람의 탓이라고 돌립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여종 하갈을 자신에게 들여보내는 것에 아무 댓구도 없이 하갈과 동침했듯이, 아내의 화풀이에 가장으로서 그냥 무책임하게 결정권을 다 넘겨줍니다. “하갈은 당신의 여종이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사래는 하갈을 향해서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사래의 질투와 시기로 인해서 하갈에 대한 학대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하갈은 견디다 못해서 도망을 치게 됩니다. 하갈은 임신한 몸입니다. 집에서 나와 봐야 거친 광야요,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갈은 무거운 배를 붙잡고 힘겹게 도망쳤을 것입니다.

 

고통스럽게 도망가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납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갈은 대답합니다. “나는 나의 여주인을 피해서 도망하나이다” 여주인을 멸시하고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한 하갈입니다. 그래도 여주인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하는 하갈입니다. 여주인을 비웃다가 하갈은 학대를 당했고 광야로 도망 나왔습니다. 하갈이 잘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순종하면서 교만하지 않게 지냈으면 그런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교만하고 어리석은 하갈이 스스로 판 무덤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판 무덤에서 끄집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알아서 잘 빠져 나오든지, 처절하게 고통을 감내하든지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길을 몰라 방황하는 하갈에게 찾아오십니다.

 

하갈은 그저 한 낫 여종에 불과한 사람인데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하갈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고도 자신이 살아 있음에 놀랐습니다. 하갈은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던 샘물의 이름을,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브엘 라해 로이’라고 명명합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불순종을 정리하셨습니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말을 잘 들으라고 순종을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순종하라” 너의 아들과 그 후손은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게 하리라”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대와 고통을 이길 수 없어서 임신한 몸임에도 도망 나온 하갈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쓰러진 하갈을 하나님은 도와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지치고 목마른 그녀를 하나님은 안아주시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잘 한 것도 없는 하갈을, 여주인을 멸시하다가 학대받아 도망쳐 나온 하갈을 하나님은 살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3류 소설 속에 나오는 무기력한 남편 같습니다.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무능한 남자와도 같습니다. 무기력하고 무능한 아브람을 그래도 하나님은 살펴주십니다. 사래와 하갈 역시도 3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가 3류 소설을 써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3류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서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인생을 이루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 없음과 불순종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일을 이루십니다.

 

눈을 들어서 여호와의 산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살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여러분을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영혼을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