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3 주일저녁1부 설교 다시 오실 그리스도

by 김세열 posted Dec 31, 200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요한 계시록 강해 4 (2:6-)
다시 오실 그리스도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님이 다시 오심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다.

사람들은 질문한다. 그것이 가능한가? 구름이란 수증기가 모인 것인데 어떻게 가능한가? 손오공처럼 근두운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가? 지구가 둥근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볼 것인가?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가 영광중에 오심이다. 이것은 모든 과학과 상식을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이제 재림에는 모든 시공간의 현세상의 원리가 사라진다.

모든 사람중에 그를 찌른 자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한 로마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그렇다면 그를 찌른자인 로마병사 한 명이 볼 것이므로 단수로 써야 한다. 그런데 왜 복수로 썼을까?

이것은 그 병정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찌르게 한 로마관원과 유대관원들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다. 더 나아가 주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자들 역시 주를 찌르는 자들을 말함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불신하고 미워하는 자들, 죽임에 동의한 모든 자에게 까지 즉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을 말한다.

지금도 예수님을 찌르는 자들이 있다. 죄악중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을 거부하는 자들이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다.

모든 자가 보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과 대비되는 말이다. 예수님이 2000년전에 처음 오실 때는 거의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하게 왔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을 때에 예수님은 초라하게 지구의 한 구석, 아니 마굿간의 구유에서 태어났다. 몇 몇의 사람들만이 그를 보았고 경배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거부했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태어났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영광의 예수님을 보지 못한 자들이며 거부한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엔 모든 사람이 다 영광의 주님을 볼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본 후의 반응은 무엇인가? 애곡이다. 왜 그들이 애곡하였을까?
믿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서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심령이 예수님을 보면서 회개함에 이른다고 전제할 때에 그 이유가 성립된다. 그러나 성경은 불신자들이 끝가지 회개하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9:20-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즉 불신자들은 재앙이 닥쳐도 회개치 않는 강퍅함이 있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재림을 보고 애곡하는 이유는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다.

요한은 이 선언을 진실로 그러하리라 아멘으로 마친다. 이 표현은 "나이 아멘." 나이는 히브리어로 아멘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아멘 아멘이다. 우리말로 정말 진짜야와 같다. 예수님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정말 진짜로 이다. 사도요한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확신으로 이렇게 쓴다. 이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8절이 그 이유다. 주님의 재림은 두가지가 성립해야 한다. 첫째는 그 분이 2000년에 오셨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계시느냐. 그분의 생명은 언제까지 있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계실 수 있는 분이냐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둘째는 그분의 능력이다. 정말로 하늘에서 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와 모든 족속을 심판할 수 있고 그래서 불신자들이 애곡할 상황을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다. 만일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계실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면, 만일 다시 오셔도 온 세계를 심판할 수 없는 자라면 재림은 의미가 없을뿐더러 그 가능성도 없다. 사도 요한의 확신하는 재림의 근거는 무엇일까?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사도요한의 확신의 근거는 변치 않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알파와 오메가라 했기 때문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A와 Z 또는 ㄱ 과 ㅎ 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즉 하나님은 시간의 처음과 시간의 나중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영원하신 분임을 말한다. 사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고 시간을 끝내실 분이다. 공간이 피조물이듯이 시간도 피조물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는 말은 공간의 창조뿐만 아니라 시간을 창조하심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영원히 계신 분으로서 어느 시점에 시간을 창조하고 공간을 창조하여 운영하고 계시다가 마지막에 시간을 끝내고 영원함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래서 그 분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적용
사람들은 모두 지금 애곡할 것인가? 주님의 재림시에 애곡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초림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대다수의 불신자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애곡함을 가져온다. 주님을 믿기에 당하는 억울한 손해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지금 애곡하는 자들은 재림할 그 때에 애곡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불신자들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하나님은 우는 자들의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신자들은 억울함은 신원받을 것이고 그토록 회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던 불신자들은 죄의 형벌을 받을 두려움에 애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심판에 대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느냐면서 부정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죄악의 관영 때문이다. 하나님이 여러 번 그들을 부르시고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피묻은 손으로 사람들을 부르셨지만 그들은 끝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속한 자들을 죽이고 핍박했습니다.

지금 애곡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우리의 삶의 시간인 70년이다. 그러나 그 때의 애곡함은 영원함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복된 것인지는 계시의 비밀을 아는 여러분에게 너무 쉬운 문제이다. 
그 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자.

제 아내가 일을 하고 들어올 때에 제가 집에서 쉴 때가 있습니다. 주로 월요일이나 토요일 오전에 그럴 때가 있습니다. 어느날은 저는 제 아내가 들어오는 순간까지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집안은 엉망 진창입니다. 두 아이들이 먹다남은 과자 봉지와 부스러기와 설거지 통에 가득싸인 지저분한 그릇들, 아이들과 제가 마구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 있습니다. 나는 어서 치워야지 하면서 그냥 누워있습니다. 제 아내가 들어와서 집안을 청소하면서 짜증스런 말을 할 것이 불안합니다. 심지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은 제가 집안 청소를 합니다. 설거지도 하고 아이들 책상과 서랍도 정리합니다. 아주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일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고 있습니다. 힘들고 피곤하지만 내 아내의 팅동하는 벨소리가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올 그 얼굴을 생각하면 전혀 힘들지가 않습니다. 제가 굉장히 애처가처럼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이런 일은 1년에 서너번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아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저는 불안해 할 수도 있고 기쁘게 맞이할 수도 잇습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선언이 여러분에게 어떤 마음을 들게 하는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두려움이라면 여러분의 삶은 바뀌어야 한다. 불신이라며 구워의 확신으로, 그리고 위로와 칭찬에 대한 기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선언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위로와 소망이 된다면 그 위로를 붙들고 소망중에 살라 그날 여러분의 머리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씌여질 것이다. 진실로 그러하리라 나이 아멘.

9절"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ㅓ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의 자기 소개를 먼저 이야기 한다.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이다.
먼저 형제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자신이 성도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말한다. 즉 동질성을 이야기 한다. 요한이 자신을 사도로서, 사역자로서, 설교자로 말하지 않고 형제라고 이야기한다. 형제란 한 부모아래 태어난 자들이며 같은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부모의 권위아래 동등한 자들이다.

우리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 권사 이전에 한 형제로 묶여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예수의 피를 이어받았고 성령의 영으로 하나된 형제이다. 교회의 직분은 직임을 위한 것이다. 높고 낮음을 그래서 낮은자가 높은 자를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단지 목사이기 때문에 성도는 잘못된 결정이라도 순종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목사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이다. 사울왕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그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하나님이 사울왕을 버렸을 때에는 이미 그는 왕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할 경우에 목사라도 성도들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권위는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결정권을 가지고 선악의 시금석이다.  우리는 목사와 평신도이기 전에 하나님의 권속이요 한 형제임을 알아야 한다.

형제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참이다. 요한은 형제로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한다. 세상에서도 형제들은 한 부모밑에서 한 집에 살며 같은 밥을 먹고 그 가정의 행 불행을 동참한다. 아버지가 잘되면 그 아들된 형제들은 같이 잘되고 아버지가 어려워지면 같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부모의 유산을 함께 상속받는다.
동참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 나라의 동참은 예수의 환란과 참음에 동참함과 연결되어 있다.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서 과와 와를 뺄 수 없이 세 개의 단어가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먼저 예수의 나라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영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나라의 엄청난 유업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동참에 기꺼이 즐거워한다. 만일 누가 이 동참에서 제외된다면 난리를 피울 것이다. 아마 할 수 있다면 법정 소송이라도 걸 것이다.

나라만 독립적으로 빼고 참여하고 싶어도 앞뒤에 환란과 참음으로 막혀있다. 환란과 참음없이 나라에만 동참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다. 고난없이 영광만 받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영광은 고난을 앞뒤로 해서 동참으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도 이 연결고리를 끊고 고난을 제외한 영광만 획득할 수 없음을 말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예수를 인하여 환란을 당하고 그러나 그 나라를 생각하면서 소망가운데 견디며 그 환란에 굴복하지 않고 참아내는 자에게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형제란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적용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형제인가? 그 표식은 무엇인가? 가슴에 붙은 예수가 하나님이란 뱃지인가? 전도파카인가? 아니면 차뒤에 붙은 물고기 표식인가? 세례증명서인가? 교회등록증명서인가? 그것에 대답하려면 예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자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을 물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인하여 환란에 동참하고 그것을 참음에 동참하길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예수로 인하여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이 진정한 형제의 내적 표식이다. 이제 우리 모두 그 표식을 우리 마음에 새기자. 그래서 예수 때문에 핍박받을 때에, 멸시와 모욕을 당할 때에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는 형제됨의 표식을 인해 기뻐하자.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기꺼이 예라고 대답한 자만이 하나님의 권속이요 예수의 형제요 사도 요한의 형제일 것임을 알고 그 표식을 다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요한의 형제의 증거로서 환란과 참음의 증거는 어디 있는가?
요한은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더니.
밧모는 에베소 남쪽에 약 90킬로 떨어진 곳에있는 섬으로 지금은 팔모사라고 불리워진다. 길이 17키로 폭은 10키로의 작은 섬이다. 파도소리와 갈매기만 들리는 외로운 섬이다. 그곳에는 탄광이 있었고 많은 범죄자들이 유배되어 와서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고 한다. 요한은 예수의 증거를 인해 이곳에 왔다고 한다. 즉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증거하다가. 박해로 인해 밧모로 유배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즉 세상의 통치자들은 요한의 증거를 막기 위해 외딴 적은 섬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사도의 입을 막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계에 증거되게하는 계시의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이 기록되어 오고 오는 교회에게 증거되게 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는 성도들의 환란과 핍박이 결코 하나님의 역사를 멈출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 환란과 핍박은 하나님을 더욱 증거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모세를 대적했던 바로는 그 걍퍅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온 천하에 알려지게 만들었다. 바로의 강퍅함이 이스라엘을 핍박하였으나 그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10대 쟁앙으로 나타난 것이다. 에스더를 핍박한 하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더 찬란히 빛을 발하였다. 억울하게 종살이과 감옥살이를 했던 요셉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영광의 초석이었다.

핍박과 고난은 마치 증기기관차의 석탄과 같다. 석탄을 집어넣으면 더 세고 강한 큰 불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불은 더많은 증기들을 만들어 내고 그 증기들의 힘은 기관차의 엔진을 더 빨리 돌린다.  핍박과 고난은 불같이 성도들을 위협하고 괴롭히나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 힘차게 달려나간다. 적용

여러분이 환란과 핍박을 받은 것을 생각해보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게 역사하신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결코 환란과 핍박은 성도에게 해로운 것으로 결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그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선한 계획과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은 영원하고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환란과 핍박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왕성하게 하며 감춰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할 기회인지를 분명히 알자. 

10절을 보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그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서 음성을 들었다.
주의 날이란 오늘날의 주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령에 감동하였다는 말은 내가 성령안에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말은 영적인 황홀경으로 빠져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영적인 황홀경이 비몽사몽의 상태와는 구별된다. 비몽사몽은 그야 말로 꿈도 아니고 꿈과 유사한 상태를 말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꿈결을 거는 것처럼 의식도 몽롱하다. 제대로 분별력이 없는 상태이고 그런 상태로 운전을 하면 위험하고 그런 사람의 말은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은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오히려 비몽사몽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더욱 또렷해지고 분명한 의식속에서 황홀한 것을 느끼게 된다.
여러분중에 성령의 감동받으려고, 계시받으려고 설교중에 주무시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꿈꾸고 나서 계시받았다고 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의 감동은 먼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듣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요한의 심령을 치는 듯한 거대한 음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할 때의 사건을 기억해보십시오. 22장에는 나와함께 잇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바로 자던 자도 깨어날 정도로 주의력 집중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보통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 진동이 우리의 귀로 들어와 고막을 진동시키면 그 진동이 신경조직을 따라 뇌에 전달되어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청력기관의 통로를 취하지 않고 직접 우리의 심령을 때려 울립니다. 요한은 이 감동으로 초자연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떨기나무를 본 것처럼 요한은 주님을 보았고 에스겔과 베드로와 바울처럼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게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감동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감동을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귀를 열어 놓으십시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말합니다. 성경말씀은 성령의 호흡입니다. 성경말씀이 성령이 감동을 주는 도구이며 역사하는 통로입니다. 말씀과 가까이 하십시오. 졸면서 기도하고 졸면서 말씀들으면 성령이 감동줄 때에 느끼지 못합니다. 이제는 자다가 깰때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지키는 , 바로 복받은 비결이며 성령의 감동을 받는 비결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Articles

2 3 4 5 6 7 8 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