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 주일저녁1부 영광과 능력을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까?

by 김세열 posted Dec 3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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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 강해 3(2:4-5)
영광과 능력을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로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5절하반절 )

요한은 은혜와 평강의 출처로서 성부 성령 성자를 말한다. 그리고 성자에 와서 요한은 다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찬양을 하며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예수그리스도에게 돌린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찬양과 영광받으시기 합당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쓴다. 또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라는 말을 사용한다.  솔라 그로리아.
그런데 막상 성도들이 드려야 할 영광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답할 성도들은 많지 않다. 왜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

어떤 학생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어떤 미스코리아는 진에 뽑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어떤 가수는 가수대상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능한 자신에게 능력을 주어서 영광스럽게 하였으므로 그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시라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참 귀한 신앙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럼 가수대상을 타지 못하는 가수나,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삶의 세세한 일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 정도만이 아닌 것입니다.   

찬양하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그분을 칭찬하는 것이고 그 분이 높아지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을 찬양한다고 해봅시다.
우리 남편은 잘생겼다. 힘이 세다. 돈을 잘 번다. 지식이 많다. 신앙이 좋다. 사랑이 많다. 성실하다. 남을 잘 도와준다.  이것은 찬양입니다.

그런데 찬양을 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을 칭찬한다고 하면서 남편 동창회에서 우리 남편은 설거지 빨래는 너무 잘해요. 교회에서 우리 남편은 건강해서 소주 두병먹고도 까닦없어서 운전잘해요.

아들 칭찬한다고 하면서 우리 아들이 이번 시험에서 90점이나 맞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평균이 반평균이 92점이야.  저는 그래서 제아들 칭찬하려면 성적으론 안합니다. 그냥 우리 아들은 제 말을 잘 듣습니다. 순종하는 아이죠. 그정도만 합니다.

비유하자면 하나님께 영광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정말 중요한 영광을 잊어버리고 어찌보면 너무 작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애쓰는 것 아닌가요?

사도요한의 영광을 생각해보자.
그 영광의 내용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우리를 사랑하사- 이것은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원인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원인이 있는데 흔히 동기라고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지금 설교하는데 설교의 동기를 여러 가지 생각해볼 수 있다. 담임목사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마지못해 할 때는 담임목사님의 권위라고 하는 동기, 둘째 내가 예배를 인도해야 부목사로 사례비받고 먹고살지하고 한다면 물질이 동기, 또는 내가 이것을 나의 어떤 설교훈련으로 생각한다면 자아발전을 위한 동기,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동기처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섬기는  사랑의 동기, 여러분은 제가 몇 번째 동기일 것 같습니까? 4번째라고 말한 집사님에게 복이 있나니.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런데 원인 또는 동기는 그것이 만족되면 사라진다.
예를 들어서 설교를 담임목사님의 동기로 하면 담임목사님이 권위를 받지 않는 상황이 되면 그만둘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설교한다면 내가 돈 많아지는 날이 설교 그만두는 날이요, 훈련으로 한다면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다고 스스로 자만하는 때가 그만두는 날이 될 것입니다. 동기가 외적인 담임목사나 돈이나 훈련이나 이런 것이라면 이것이 성취되는 날이면 행위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구원하신 동기가 사랑이라고 했을 때, 구원의 행위가 외적인 어떤 것에 의해 사라질 수 있습니까? 즉 여러분의 조건에 의해서 구원이 변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착하든 안착하든, 이쁘든 못났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봉사를 잘하든, 잘 못하든, 설사 믿음이 좋든, 믿음이 약하든, 구원의 동기가 사랑이면 구원이 변합니까?
단 우리의 구원이 변하려면 구원의 동기인 하나님의 사랑이 변한다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

사람의 사랑은 변할 수 있다. 왜 이혼률이 급증합니까? 결혼시의 사랑과 권태기의 사랑이 다르다. 신혼에는 아내가 무엇을 해도 사랑스러운데, 지금은 무엇을 해도 이뻐뵈지를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변했다. 왜 변했느냐 많은 경우 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허리 24였는데 지금은 허리가 42다. 전에는 밥을 먹을 때는 젓가락으로 집어먹더니 지금은 밥주걱으로 냄비채 먹는다. 전에는 건강했는데 지금은 병들어 불구가 되었다. 전에는 부자엿는데 지금은 실직에 가난뱅이다. 전에는 낭만적이더니 지금은 목석이다. 등등의 조건이 세월이 흘러 변하니 사랑도 변하더라는 것.

즉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이 있고 현재 사랑하는 사람이 다르다. 또 미래에 사랑할 사람이 다르다. 사람의 사랑은 시간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시제이다.
신대원초에 헬라어를 공부하여서 제가 600명중에 12등을 했다. 그런데 지금 아는 것은 거의없다. 그래도 해야하는 이유중에 중에 몇가지 남는게 있다. 현재시제의 사용이다. 우리를 아가폰티 함으로서 즉 우리의 구원의 이유가 사랑함인데 그 사랑함은 현재시제이다. 현재시제에 사랑은 현재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냅니다. 과거에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니다가 아니고 현재는 사랑하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가 아닙니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란 언제나 사랑함을 말한다. 과거에 사랑했다가 아니라 미래에 사랑할 것이다가 아니라 늘 현재 사랑함이다. 현재 사랑함은 늘 사랑함이며 영원하고 불변적인 사랑을 말한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이유이다.

어떤 빵가게에 이런 표어가 붙었다고 합니다. 내일 처음 오는 사람에게 빵을 무료로 드림. 이것은 아무도 받아갈 수 없습니다. 돈빌리러 온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제 이야기 하지 그랬어" 이것도 안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삽니다. 그 현재는 가난한 현재요, 죄짓는 현재요, 질병중에 있는 현재요, 감옥에 갇힌 현재요, 핍박받는 현재입니다.

사도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핍박받고 고난당하는 현재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부요하고 건강할 때에 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난하고 아플 때에도 변치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잘 나갈 때뿐 아니라 지금 고난중에도 여전히 사랑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했던 과거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 잘 못하는 현재에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우리의 환경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분이 있습니까? 입시에 떨어졌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는 학생이 있습니까? 오랜 질병을 고쳐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까? 왜 사업이 부도나고 가난하게 되었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합니까?

요한은 우리를 사랑하사를 현재시제로 찬양하며 우리를 권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은 현재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놀랍습니다. 사랑할 조건도 없고, 사랑할 만한 이유가 없어도 우리를 언제나 변치않고 사랑하심, 이것이 하나님이 찬양받고 영광받을 이유가 아닐까요. 내가 좋은 직장에 합격하고 출세하고 성공할 때만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그런 자들에게만 영광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심으로 인해 찬양과 영광은 우리 모두의 것이며 언제나 해야할 찬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내용이 바로 날 사랑하심입니다. 

그럼 우리를 사랑하심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요한은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노래합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심이 사랑의 증거요 영광받으실 이유입니다.

해방하시고는 해방하셨다는 과거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는 단순과거로 쓰였는데 이것은 단회적이고 그 결과가 지속적일 때 쓰는 시제입니다. 예수님이 죄에서 해방한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 결과는 지속적이어서 우리 모두에게 해방을 주는 것입니다. 한번 해방하고 다시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해방되어 옥문을 열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서버린 것과 갇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죄를 짓고는 죄의 형벌을 두려워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방은 영원하고 지속적입니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아십니까?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에피라(코린토스의 옛 이름)의 왕. 테살리아의 왕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로, 인간 가운데 가장 교활한 지혜의 소유자라고 한다. 나쁜 일에 관해서는 천재인 아우톨리코스가 그의 소를 훔치고 발각되지 않도록 소의 겉모습을 바꾸었을 때, 시시포스는 소의 발굽에 표를 해서 그것을 간파하였다. 형제인 살모네우스를 미워해서 그를 죽이려고한 시시포스는 살모네우스의 딸 티로를 범하여 아들을 낳게 하라는 신탁(神託)을 받고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 신탁을 알게 된 티로는 자기 아들을 죽인다. 또 그는 하신(河神) 아소포스에게 그의 딸을 유괴한 범인이 제우스라고 가르쳐 주어 제우스의 노여움을 샀다. 이러한 생전의 소행 때문에 그는 저승에서 큰 돌을 산 위로 계속 밀어올리는 벌을 받았다. 돌은 꼭대기에 이르게 되면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이 일을 되풀이하였다고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죄를 지을 때마다 다시 원점에 돌아가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사라져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으심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0-11)

우리는 나의 선행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해방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서 해방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해방의 성격이 지속적이기에 영원히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해방하였는데 무엇으로부터 해방하였느냐? from의 문제입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죄의 종이며 사망에 갇힌 존재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말합니다. 또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 죄는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며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누구도 죄에서 스스로 해방될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죄수와 같습니다.

자 이제 가정을 해봅시다. 어떤 착한 사람이 사형수에게 사형집행일까지 자신이 가진 권세와 능력으로 명예와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준다고 해봅시다. 아니 사형당일까지 감옥을 호텔처럼 꾸며준다고 합시다. 맘것 즐길 쾌락을 다 준다고 합시다. 그것이 사형수에게 최고의 큰 기쁨이요 칭찬받을 일일까요? 그것도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사형수에게 가장 큰 은혜는 그 옥문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이며 가장 칭찬받을 일이며 영광돌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영광돌릴 이유를 세상의 복에서 찾아서는 부족합니다.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한것도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혜이므로 영광돌리고 그 능력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난하고 아프고 고난받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영광과 찬양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였는데 무슨 방법으로 해방하였습니까? by의 문제입니다.

'그의 피'로입니다.
요한은 피라고 할 때에 어떤 상징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피입니다. 요한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어진 손과 발과 허리에서 나오는 엄청난 피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생생한 광경이었고 끔찍한 사건입니다.

여러분중에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제 조카가 십여년 전인데 초등학생때에 장롱에 배게를 집어넣으려고 펄쩍 뛰다 떨어지면서 장롱 신주로 된 손잡이에 허벅다리를 찢었는데 피가 꽐꽐솟아졌습니다. 저는 다리에도 그렇게 피가 많이 흐르는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몸서리 치는 광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요한에게 피는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흘리는 피를 상상하게 합니다. 너무도 끔찍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에 요한은 왜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런 무서운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제 분명히 그 이유를 압니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유일무이한 대가였습니다. 가장 값지고 귀한 그 피로, 생명을 바쳐 우리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땀흘리고 수고한 사람들을 잊지못하고 감사해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의 증거를 찾아 헤멥니다. 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린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100마디의 말보다 더 강력한 사랑의 증거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이유로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노래할 마지막 이유를 살펴봅시다.
6절에 보면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
주님이 우리를 구원한 이유는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죄에서의 해방이었으며 그의 대가는 바로 주님의 피였습니다. 그럼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반드시 성취되어 동일한 결과를 가집니다. . 그 목적을 볼 때 우리는 주님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삼으셨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다. 즉 국적 이동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골로새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세상나라는 멸망할 나라요 죄와 사망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될 특권을 가진자로 만들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될 뿐이 아니라 그 왕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릴 자라는 의미이다.

"내가 지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 앞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제사장이 된다는 것 역시 대단한 특권임을 여러분이 이미 아실 것입니다. 제사장은 선망의 직종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나 제사장들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명예와 부를 가진 자입니다. 최고의 영광된 일이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족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과거를 보십시오. 우리는 죄의 종이고 사망의 비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조건없는 사랑이며 불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원인이 되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그 해방은 지속적입니다. 결코 우리의 행위로 인해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귀한  그 분의 피값으로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은 얼마나 능력이 많으시고 선하신 분입니까?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노래할 이유가 없다구요. 그런 성도는 없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핍박과 질병과 사고가 그분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해가 장마철에 가리워졌다고 해서 해가 사라진 것이 아니듯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영원한 이상 우리를 사랑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이상, 우리를 위한 영광스런 목적이 분명히 실현될 확신이 있는 이상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찬양과 영광을 노래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한낱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날 세상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왕의 나라의 백성일 뿐아니라 영광중에서 세상을 다스릴 자들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새 신분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요한은 감옥에서 감격적으로  영광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고난이 와도 영광송을 불러야 합니다. 충분한 이유가 넘칩니다. "속죄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양하리라. 내게 자유주시려고 주가 고난 당했네 크신 사랑 찬양하리나의 죄 사하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나의 주 찬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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