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케 하는 자와 구원을 이룬 자

by 이윤정 posted Mar 11, 200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2002년 3월 10일 주일저녁 2부 예배
본문 : 사무엘상 14:1-52
제목 : 피곤케 하는 자와 구원을 이룬 자

  배경은 블레셋과의 전쟁중입니다. 지난 주에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그 스스로 번제를 드려서 바로 그 타이밍에 맞추어 사무엘이 들어왔고, 그것으로 사울의 왕위가 폐하여 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전쟁 가운데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란 인물이 사울과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한 작은 전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며, 신앙의 사람입니다. 장차 나타날 다윗을 처음 보자마자 사랑하여 그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나단을 보면 사울과 다른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특히 오늘은 사울과 너무나도 다른 요나단의 모습을 극대화 시킴으로 사울의 무능성을 보여주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병기 든 자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 들어가 싸움을 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는 행동하는 자입니다. 6절에서 요나단은 말합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신앙의 고백은 참으로 겸손하며 확신에 찬 것입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지난 주에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군대의 수 그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요. 그 앞에서 흩어지는 이스라엘 군대의 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여호와의 구원은 구원인데 전쟁은 수에 달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여호와의 구원은 아무리 적은 수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뜻과 함께 있음을 믿었습니다.

  특별히 매력적인 것은 요나단은 자신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함을 가두어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라는 고백은 여호와께서는 수와 상관 없이 승리를 주는 분이시되 그 기쁘신 뜻 가운데에서 역사하신다는 겸손한 신앙입니다.
  항상 우리가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리라는 것은 확고한 신앙이라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과 때와 방법을 그 자유함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시지만 그 분의 방법 가운데에서 기쁘신 뜻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가장 선한 길임을 알게 하십니다.

  요나단은 병기 든 자와 함께 블레셋으로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용맹한 일입니다. 믿음의 일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만약에 이 일 가운데에서 기쁨으로 일하신다면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싸인을 원합니다. 만일 블레셋인들이 그들을 보고 기다리라 하면 올라가지 말고, 올라오라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신다는 싸인으로 알아 올라가리라고 고백합니다.

  요나단의 서원과 행동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뜻 중심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오라 합니다. 올라갔습니다. 요나단이 올라가자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과 병기든 자에게 엎드러 집니다. 20인 가량의 블레셋 인들을 도륙했습니다. 이 일은 수적으로는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을 큰 일로 묘사합니다. 신앙의 승리이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뜻이기에 이 싸움은 큰 싸움으로 기록됩니다.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이 이 싸움에 대해 듣고 대체 누군지 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요나단과 병기든 자임을 알게 되지요.
  이제 이 작은 싸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혼란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블레셋 쪽에 붙었던 히브리 사람이 오히려 요나단을 도와 블레셋을 치는 데 협력하게 됩니다. 전혀 생각지 않던 원군이 도와줍니다. 싸움이 커져 이스라엘이 뒤늦게 합류합니다. 블레셋 진영 안에서 일어난 이 혼란은 하나님께서 싸움 가운데 임하고 계심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요나단이 다 죽인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치고 계십니다. 이 승리의 발단은 요나단의 용기요, 믿음이요, 겸손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역사의 시작을 주의깊게 바라보기 원합니다. 큰 기적의 시작을 숨죽이며 바라보기 원합니다. 오늘의 이 역사와 기적의 시작은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와 겸손에 있었음을 보여 저와 여러분도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며, 겸손히 나아가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앞 부분은 요나단의 매력적인 신앙이 이룬 큰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24절부터는 사울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큰 전쟁이 있은 날 사울이 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이 날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을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선포말입니다.
  요나단이 전쟁에 나아가게 된 것이 그의 겸손함에서 시작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한 것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울은 이러한 절차 없이 무조건적 선포를 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 금식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다. 전쟁시에 금식이 관례도 아닙니다. 금식하므로 전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힘이 없어 금식하면 전쟁에 임하기 힘듭니다. 사울의 안타까움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은 반드시 제사장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길인데 사울은 이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경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전쟁에서 승리하고픈 그의 마음은 백성들에게 금식을 강요하는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지키지 못한 자가 바로 요나단입니다. 믿음의 사람, 용기의 사람,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한 사람 요나단이 그 맹세를 어김으로 말미암아 그 맹세가 옳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수풀에 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힘이 나는 꿀입니다.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그 꿀을 먹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싸움에 힘있게 나아갔고 더 큰 승리를 이룰 수 있었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꿀을 주심은 그것을 먹음으로 힘을 주시려는 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영적 상태는 이러한 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의 의보다 앞서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을 하지 않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사울은 한마디로 피곤케 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피곤케 한 자입니다. 백성들은 전쟁 후에 너무 피곤하여 블레셋에서 탈취한 양과 소와 송아지를 취하여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 있는 채 먹는 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금식이 오히려 성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요나단이 금식하지 않은 것 때문에 블레셋 과의 전쟁이 계속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불합리한 것 같은 맹세라고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이기에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움에 임하도록 응답지 않으십니다. 제비를 뽑자 요나단이 뽑혔고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이 말은 확실히 사울이 하나님과 함께 일한 것이 아니고 요나단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였던 것임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설교의 제목을 피곤케 하는 자와 구원을 이룬 자라고 지었습니다. 만약에 사울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 고생 엄청나게 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우리 가정의 아버지였다면 어땠을까 역시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이었으면 어땠을까? 다윗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용기와 겸손과 자유함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요.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사람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요.

  저와 여러분이 사울 편이 아니라 요나단 편 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까 하노라" 하는 겸손한 실천주의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던 다윗의 통치와 비교할 때에 사울의 통치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없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백성이 피곤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피곤케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로 불합리하고 괴롭게 하기 위해 우리 위에 군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항상 세심히 우리를 살피시는 참 좋은 분이심니다. 우리의 왕, 우리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로 거하게 하는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가 항상 은혜로 감사로 다가오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Articles

3 4 5 6 7 8 9 10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