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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눈에 보여 주면 믿겠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해서 하나님이라고 믿겠는가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해도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면서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할 것입니다. 아무리 증거를 보여도 거짓이라고, 사기라고 하면서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 스스로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가르침을 보고 듣고서 믿으라고 했지만 거절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블레셋을 다스리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협상을 요청하면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 벌어졌던 몇 가지 사건을 아비멜렉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전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자기 궁으로 들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내가 없는 여자를 첩으로 들이려고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인이며,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아비멜렉은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눈에 보기에 좋은 땅에서 거하라고 했습니다. 사라에게는 은 1천을 주면서 그녀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어야 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 집안의 닫혔던 태가 열려지는 치료의 기적이 나타났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 사건을 결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억 속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아들까지 낳은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있다가는 범상치 않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 듯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지만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도와주고 보호하시는 것을 보면서 아비멜렉은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래도 그 생명과 순결은 지켜야 하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인 우리를 위험과 실패로부터 보호하시며, 사건과 사고와 오해와 불신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기적과 도우심 때문에 아비멜렉이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을 했겠지만, 아브라함의 일상의 삶을 보면서도 분명히 이 말을 했던 것을 성경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했을까요? 세 가지 정도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의 평안의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만나서 맹세를 하는 과정에서도 평안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안한 삶을 삽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 때문에 사자굴에 던져질 수 있다는 상황을 알면서도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해서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우상에게 절하라는 강압에도 절하지 않고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평안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월호에 관련된 말을 하는 것이 아직 조금은 부담스럽고 죄송스럽지만, 희생자 중에 단원고 김정민 군의 아버지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회개하고 나온 것처럼 돌아와도 감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정민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정민 군의 아버지는 한 교회의 장로라고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어찌 그런 고백을 평안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목사이다 보니까 장례 집례를 가끔 합니다. 그 때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믿는 사람들의 장례식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장례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고 돌아가신 분과 가족들의 장례는 평안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어디로 가신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평안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간혹 옆에서 장례를 치루는 믿지 않는 분들을 보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원망과 탄식으로 장례를 행하는 모습을 많이 발견합니다. 물론 죽음 앞에서 어떤 사람이 초연할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두 번 째는 아브라함은 자비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물을 빼앗겼을 때에도 자비를 베풀고, 가만히 오래 참다가 아비멜렉에게 말할 기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평안한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서의 대명사 중 한 사람인 요셉은 어린 시절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당했습니다.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형들을 만났을 때에 형들은 동생 요셉 앞에서 자신들을 죽이거나 해롭게 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었다”고 말하면서 슬퍼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고 합니다. 요셉은 원수라도 갚을만한 상황에서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는 누군가에게 찬 한 잔 사주면서 위로하는 것도 자비이며, 다들 싫어하고 회피하는 누군가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도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 번째는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은 후에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어놓고서 기도했으며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게도 아직 믿지 않는 친구들이 몇 명이 있습니다. 자주 만날 시간도 없지만, 아주 가끔 통화를 하기라도 하면 내게 기도해달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목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들어왔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 증거로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며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을 도우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평안과 자비와 기도의 일상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하게 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