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 영광, 말씀

by 박현덕 posted Apr 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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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
본문: 이사야 40:1-8
일시: 2002년 4월 19일 서울광염교회 금요철야예배


하나님의 위로
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는니라 할지니라

하나님의 영광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한자성어 중에 사면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초왕 항우와 한왕 유방이 하남성을 경계로 천하를 양분한 상태에서 5년간 패권다툼을 벌입니다. 힘과 기에만 의존하다가 범증같은 유일한 모신까지 잃고 밀리기 시작한 항우는 휴전 제의를 하게되고 유방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휴전후 항우는 병력을 되돌려 팽성(서주)를 향해 갔으나 유방은 참모 장량과 진평의 진언에 따라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습니다. 이윽고 해하에서 한신이 지휘하는 한나가 대군에 겹겹이 포위된 초나라 군대는 군사가 줄어든데다 군량미마저 끊겨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나라의 장량이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고향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었는데 이 심리작전이 맞아들어서 이 노래를 들은 초나라의 군사들은 고향의 노랫소리에 울적해져서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항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한나라는 벌써 초나라를 다 차지했는가? 어찌 저토록 초나라 사람이 많단 말인가?" 이미 끝장났다고 생각한 항우는 마지막 만찬을 베풀었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고 합니다.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지만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때는 불리하고 추는 가지 않누나
[時不利兮 不逝(시불리혜추불서)]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은고
[ 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우야 우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는 항우였지만 사방에 초나라의 노래가 들릴때 자신의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고 다음날 800명을 데리고 포위망을 뚫고 오강까지 갔지만 결국 강을 건너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면초가란 말은 앞뒤가 꽉 막혀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던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였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혹 이 항우처럼 사방이 꽉 막힌 것 같고 도저히 돌파구가 없어보이는 그러한 상황에 처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앞을 보아도 또 뒤를 돌아보아도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문제는 눈덩이 처럼 점점 커져만 가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마저도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와 더 이상은 돌아갈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들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성전은 이미 바벨론 군인들에게 철저하게 짓밟힌 후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처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바벨론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서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애통한 심령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진 꿀송이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음성은 또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죄악의 영향력 가운데 속박당한 현실을 애통해 하는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에게 들려지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삶의 현실의 속박 가운데 안타까와하며 애통해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라사대'라는 말이 세번 나오는데 그 말을 중심으로 1-2절 3-5절 6-9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지는 한 음성이 있습니다. 이 음성은 어디서 들리는지 누가 말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음성이 하나님의 선포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포의 내용은 세 번에 걸쳐 반복되며 점점 발전합니다. 우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각각의 말씀은 과거, 현재,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 세 부분을 차근차근히 살펴보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합니다.

1. 과거 - 하나님의 위로

가장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절망의 상황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위로하는데 어떻게 위로하느냐 하면 2절에 보니까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라고 했습니다.

절망가운데 있을 때는 그 누구의 음성도 귀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아무리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주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가만가만히 말하여도 듣기에 어려운데 책망의 말투일 경우에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고난가운데 있던 욥에게 한 말들을 한 번 보십시오. 욥의 친구들의 말이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여도 죽음과도 방불한 아니 죽음보다 더 못한 고난 가운데 있던 욥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도 잃고 국가도 잃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리 좋은 위로의 말을 하여도 쉽게 귀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정다이 말하라고 하십니다. 말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고도 하는데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의 정다운 말한마디는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하루종일 집안 일에 시달리고 아이들에게 시달린 주부들도 집에 들어와 다정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힘들지?"라고 위로하는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봄눈 녹듯이 녹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장성하여서 이젠 인생의 아무런 낙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들드린다는 자녀들의 따뜻한 편지를 읽으면 그 편지로 말미암는 위로는 그 어떤 위로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정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는데 그 위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절 말씀에 보면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외국의 속국이 되어 종노릇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배나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이미 충분하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바벨론의 치하에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에 들렸다면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빚더미에 앉아서 평생을 빚만 갚으며 살던 사람, 죽을 때까지 빚더미에 눌려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빚을 이제는 갚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선포의 말씀은 일생의 가장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큰 위로의 말씀도 바벨론의 이스라엘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에서도 애통하는 실령을 지닌 사람에게만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없이 포로생활을 즐기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포로생활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 결코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5:4에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시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부요하게 살던 사람이 우리나라의 해방을 그 해방의 소식을 기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해 하고 이제는 어떡하나 하며 근심걱정에 쌓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의 치하에서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소식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만세를 하루 온종일 외쳐도 가시지 않을 감격과 기쁨과 위로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남북분단의 갈라진 상황을 진정으로 애통해 하는 사람만이 통일된 이후에 통일의 진정한 기쁨과 그로인한 위로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동일하게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죄악의 사슬에 묶여 사는 인생을 안타까와하고 애통해하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선포, 자유의 선포가 참된 위로가 되고 참된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없이 죄악된 생활을 즐기던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요3:19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의 상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애통함이 있습니까?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합니다. 그 사도바울의 마음을 느끼며 애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올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이 그 무엇보다도 더 큰 감격으로 다가올 줄 믿습니다.

2. 현재 - 하나님의 영광

애통함이 있어 위로의 말씀을 듣고 위로받는 사람에게 두번째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고 선포합니다. 참된 위로를 받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기에 앞서 그 길,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말씀을 그들이 여호와의 허락하신 땅으로 귀환하는 큰 길이 열리리라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을 의미합니다. 출애굽의 여정이 시작되듯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큰 역사에 먼저 여호와의 길이 예비되어야 합니다.

존 번연이라는 작가가 쓴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에 보면 주인공인 크리스찬이 천국에 가기까지 거쳐야 할 수많은 고비들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로 유혹에 빠져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려는 유혹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크리스찬은 이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나아가 마침내 천국에 도달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가는 길에 들어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유혹을 이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기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길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여호와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평탄케 해야 합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어야 합니다. 골짜기같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음흉한 생각들이 메워져야 합니다. 산처럼 높아진 교만한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고르지 않고 삐딱하게 굽어있는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험한 곳처럼 까다롭고 강팍한 마음, 상처입은 마음이 평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십시요. 여러분이 큰 일들을 해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큰 상을 받았다고 해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하나님을 찬양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축복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을 축복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잘나서, 내가 무언가를 잘해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마음의 깊은 죄악의 골짜기를 메우고 교만의 높은 산을 헐며 상처입은 험한 마음을 평지로 만드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이 중요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이지 예루살렘이 아름다와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소중한 것은 그 삶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3. 미래 - 하나님의 말씀

말하는 자의 소리는 계속해서 더 크게 외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영영히 서리라 하라." 외치는 점점 더 흥분된 소리로 미래적 전망을 선포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삶은 궁극적으로 그 삶이 마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게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 날에 하나님앞에 서게 되는 그날에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 것 같습니까? 마지막 때가 되어 예수께서 다시 오셨는데 우리의 죄악된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있겠습니까? 아니면 모두 사라지겠습니까? 죄악된 모습이 남아있으면 그게 어디 천국입니까? 지옥이지요. 부끄러움과 수치가 가득한 지옥이지요. 천국에 가서도 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한다면 그곳은 지옥과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천국에 갔는데 죄악된 모습이 남아있지 않으면 무엇이 남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죄악된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가서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있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시간만이 남을 줄 믿습니다. 예수님 다시오실 그날에 하나님 말씀대로 산 시간들이 가득하여 기쁨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지혜로운 다섯처녀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하면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왕상 17:1에 보면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라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온전히 서 있었기에 이러한 선포가 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홍해위로 내밀었던 모세의 손은 이미 모세 자신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도구로 쓰임받은 손이었습니다. 우리의 손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이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마7:24-27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그 길을 반석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고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세운 어리석은 사람같다고 표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저는 풀과같은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는 풀과같은 인생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언제든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할 인생입니다. 여호와의 기운이 불면 풀과같이 마르고 꽃과같이 시들어버릴 인생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보잘 것 없고 연약하지만 우리의 사람에 하나님의 말씀만은 살아 역사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가운데 여호와의 위로를 받기 원하십니까?
죄악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을 지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길 원하십니까?
마음의 죄악을 갈아엎어 평탄케 하십시오.
마지막 날에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드러나는 귀한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