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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밭에서 사과를 수확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밭에 떨어져 버려지는 사과 한 개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나요? 만약 2시간만 일하기로 했는데, 1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런데 2시간 수당만 준다면 싸우실래요, 아니면 참으실래요? 당신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거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예루살렘 교회 수장인 야고보는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유대주의자)들이 들었도다”(행21:21)라고 하면서 오해를 풀기 위해서 하나님께 서원한 네 사람을 데리고 비용을 다 내어서 결례를 행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바울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속이 상하고 불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폄훼하고 해치려는 의도가 있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바울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성령을 따라서 행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정결예식에 참예하라는 요청에 네 사람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합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정결예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정결합니다. 바울은 유대 문화의 사소한 관습들로부터 자유로웠지만 스스로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9:1~7)고 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마땅히 누릴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양떼를 기르고 양의 젖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밭을 갈은 후에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곡식을 떨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자유인이며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누리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9:12)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고 자유를 제한하고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였으나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 후에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쁨으로 제한하고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핍박 속에서도 믿는 사람들은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소중한 것이며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가졌습니다. 집회와 모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고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권리를 포기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를 누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의 영혼처럼 진정으로 해방된 영혼은 그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속박되어있지 않다’고 브루스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복음과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우리도 은혜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은혜를 알며, 의의 면류관과 베푸실 상이 있음을 알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을,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우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 일찍 출근해서 청소하기, 정리정돈 해놓기는 어떻습니까? 친척 모임에서 음식만들기, 설거지, 궂은 일 먼저하기는 어떻습니까? 코로나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앞장서서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은혜 받은 자, 은혜를 가진 자, 은혜를 아는 자이며, 은혜를 누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