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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3 07:19

난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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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동아리에 들어가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결국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린다고 앉았는데 찬송가 대신에 출정가와 데모가를 불렀습니다. 성경보다는 이념 서적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데모가를 부르고 있으면 피가 뜨거워지며 정의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서 동아리방에 들어가 보니 선배들이 혼숙하면서 술과 담배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왜 정부나 다른 사람을 향해서 데모를 하고 돌을 던지는가?’ ‘자신을 살피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동아리를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삶의 기준이 자신의 즐거움, 만족, 성공이지 하나님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삶의 기준이 성경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몇 가지 주제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결혼은 무엇입니까? ‘결혼이란 남녀의 좋은 점을 합쳐 위로는 부모와 가문을 받들고, 아래로는 후손을 잇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정의는 다분히 유교적인 결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결혼관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것은 부모를 미워하고, 부모와 단절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결혼 후에는 부부가 연합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가정이 안정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연합해야 제대로 효도할 수 있으며 자녀를 키울 수 있습니다. 부부가 연합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의 편이 되어서 지지해줄 수 있습니다.

 

정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즘 정치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있어서 장애, 성별, 인종, 지역, 언어, 세대 등에 있어서 누구든 차별 받지 않을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차별금지’라는 좋은 명분과 용어를 사용해서 동성애, 동성혼, 이단 종교에 대해서도 잘못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성소수자나 동성애자나 이단 종교인의 인권을 보호해주고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잘못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지, 방관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 치명적인 성의 혼란과 폐해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책에 대해서 성경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이 국가에게 준 것입니다. 국민의 권력이지 국가의 권력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정치가 오만과 독선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면 막아야 합니다. 정치가 바르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견제하고, 바른 소리를 내야 합니다. 정치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적인 잣대로 무엇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초래할 혼란과 폐해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국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정치하게끔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투표, 정책입안에 정당한 청원, 신앙의 자유에 대한 요구 등은 정치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저출산은 성경적인가요, 세속적인가요? 요즘 젊은 세대는 아이 낳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저출산 분야 예산은 계속 늘고, 임신과 출산 가정을 지원하는 정책은 다양해지는데 출산율은 오히려 추락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임신과 출산, 양육의 사회적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보육시설 부족,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 부동산 가격급등, 가중되는 사교육비의 압박,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문화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한 신문에서 한동대 유장춘 교수의 칼럼을 읽었습니다. 저 출산은 복지적이거나 구조적인 문제들, 즉 인간의 외부적인 주제들보다 더 깊은 내면적인 문제들, 즉 실존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진단했습니다. 결혼 후에 아이를 낳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의무에 묶여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비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자유의 권리를 선택하지만, 생명과 사랑은 포기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로움보다 더 강한 부자유함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기를 낳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존재와 의미를 향한 실존적인 선택인지, 생명과 사랑을 향한 모험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선택인지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있어서, 진학과 취업에 있어서, 돈과 성공과 직업관에 있어서 당신은 과연 성경적인가요, 세속적인가요? 세상 사람들은 현명하며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불완전하고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인간은 타락의 결과로 인해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때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 하늘나라의 대사,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목자 되신 예수를 따라가면서, ‘난 알아요’라고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합니다.